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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은 결코 죽지 않는다”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7-06-27 00:00:00조회53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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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서울 홍익대학교에서 열린‘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한 정상진씨가 기 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보배 객원기자

 

“통한의 눈물 삼키며 맨 손으로 황무지 일구었다” 고려인 강제 이주 70주념 기념 학술대회 참석한 정상진씨

 

“1937년 9월 25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소를 운반하는 화물차량 32칸으로 된 첫 이주 열차가 떠났습니다. 당시 19세 사범대학 학생이었던 나 자신도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열차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울음과 통곡, 저주의 목소리를 듣는 듯합니다.”

자주색 셔츠와 쥐색 싱글 양복을 맞춰 입은 정상진씨는 89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뚜렷하고 힘있게 발언을 이어갔다. 현재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살고 있는 그는 15일 홍익대학교 와우관에서 열린 ‘고려인 강제 이주 7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및 강연회’ 참석차 한국에 왔다.

강제 이주의 비극은 1937년 8월 스탈린이 고려인 이주에 대한 비밀 명령서에 서명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극동의 소련 영내에 거주하는 20만여 명이 남김 없이 중앙아시아로 쫓겨 났다. “이주 기간에 강제 이주를 반대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고 우려되는 인텔리와 군 장교 등 2800여 명이 체포되어 학살당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빵공장에서 빵 굽는 기술자에 불과했던 제 부친도 총살당했지요. 나는 아직도 부친의 운명 장소를 모릅니다.”

강제 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집과 가구, 농기구와 돈도 없이 땅굴을 파고 추운 겨울을 나야 했다. 그 결과 1937~38년 이주 초기에 풍토병과 추위로 죽은 자만 2만여 명에 달했다.

1945년 소련군 태평양함대 소속으로 나진·웅진·천산에서 대(對) 일본군 전투에 참전하기도 한 정씨는 해방 뒤 북한으로 가 김일성종합대학 러시아문학부장 등을 거쳐 1952~55년 동안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급)을 역임했다.

1957년 소련으로 귀환해 ‘레닌 기치’(고려일보의 전신) 기자, 문학평론가 등으로 활동했다. 북한에 있는 동안 홍명희 이기영 한설야 등과 북한 문단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그는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을 읽고 크게 감동 받아 항상 가까이에서 모셨다. 너무 깨끗하고 선한 분이었다. 어디를 가든 재치 있는 입담 덕분에 노동자 농민들이 홍 선생 주변에 몰려 들었다”고 회고 했다. 한국현대문학회와 국제한인문학회가 주최한 이날 학술대회는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고려인들의 역사와 문학을 이산(離散)의 관점에서 조명했다. 정씨는 ‘문학 작품에 나타난 강제 이주의 애환’을 주제로 강연했다.

정씨는 “소련 연해주에서 일어난 조선족의 강제 이주는 세계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참혹하고 비참하고 야만적인 이주였다”며 “우리 고려인들은 강제 이주 후 소련 헌법에 제정된 많은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소련 대도시에서 공부할 권리도,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도 빼앗겼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한인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좌절하지나 절망하지 않는, 하늘이 준 재능을 갖고 있다. 맨 손으로 황무지를 일군 고려민족은 이제 54만여 명에 이른다”며 “그런 처참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서울신문]

 

‘때만 되면, 때만 되면…. 나는 빈 주먹만 쥐었다 편다.’

 

“1937년에 강제이주당하면서 수십명의 고려인 대학생들이 김동환 시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70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15일 홍익대에서 열린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 특별 학술대회’에 초청된 고려인 평론가 정상진(89)씨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는 아직도 열 아홉살 대학교 2학년 때 극동의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향하던 30량짜리 열차를 잊을 수 없다. 앓다가 죽은 사람은 기차역에 버려졌고, 이주대상자 20만명의 10%인 2만명이 죽었다. 대부분 아이와 노인들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빵공장에서 빵을 굽던 아버지는 총살을 당했다. 강제이주 얘기만 꺼내도 죽음을 당하던 혹독한 시간이 벌써 70년이나 흘렀다.

정씨는 “내게 남아 있는 게 있다면 나라를 위해 일본과 싸워 이겼다는 걸 자랑할 수 있는 것뿐”이라고 말했다.1945년에 소련군 태평양함대 해병대에 입대한 그는 북한 인민정권 수립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고 같은 해 9월 원산항에서 김일성을 맞이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김일성은 정씨를 “나를 처음으로 맞아준 사람”이라며 아꼈다.1952년부터 3년간 북한 문화선전부 제1부상(차관급)을 지내게 된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