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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화가 김블라지미르 "내 고향은 두개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7-07-04 00:00:00조회5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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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있는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 앞에 선 고려인화가 김블라디미르씨. 한국사립미술관협회 제공 (‘까레이스키’전 내한한 화가 김블라디미르)

 

 

화가는 직업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입니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화가 김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61)가 인터뷰 말미에 툭 던진 말이다. 그림값이 주요 화제인 한국 미술판에 날리는 비수 같다.

고려인 중앙아시아 정주 70돌 기념전인 ‘까레이스키’ 전시회를 위해 지난 30일 일행 9명과 함께 6시간 반 밤을 도와 서울에 온 그는 피곤할 법한데 긴 시간 동안 속내를 모두 보여주었다.

타슈켄트 포타로스타벨리 22번지 2층 아파트의 위층에 부인과 함께 거주하는 그는 고려인 화가 가운데 잘 나가는 쪽에 속하는 전업화가. 추상적인 풍경화가 주종이다. 도형화한 풍경들이 차가운 색과 뜨거운 색으로 나뉘어 화폭 가운데서 충돌한다. 이러한 그의 ‘국경없는’ 그림은 1993년 타슈켄트를 방문한 유럽 화상의 눈에 띄어 이름값을 높이기 시작했다. 95년 이래 독일의 아엠(art magazine)갤러리와 계약을 맺고 한해 2~6개월을 유럽에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한다. 파리국제예술센터 상임회원이기도 해 유럽에는 많이 알려진 편이다. 지금까지의 개인전은 대부분 독일에서 열었다. 그림은 한점에 1천달러, 월 평균 넉점 정도 팔린다. 독립 이후 내수가 끊기면서 주요고객은 미국, 한국, 독일인이 대부분이다.

사회주의 예술 반발 14년 절필
추상적 풍경화로 유럽서 인기
“화가는 직업 아니라 마음상태”

잘 팔리는 작가가 되기 전 14년 동안 절필의 아픔이 있었다. 타슈켄트 사범대 회화과 재학 때부터 프로파간다적인 사회주의 예술에 반발한 그는 노동절 등 국경일에 그에 맞는 그림을 그리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의 주제는 자연과 평화. 당연히 관계자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졸업 뒤 세 해 동안 자기 고집대로 밀고 나갔지만 주변의 불편한 시선을 못견뎌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모두 버렸다. 이웃집 샤워실 만드는 벽 판으로 줘 버린 것. 그리고는 정원 설계사가 됐다. 돈벌이 틈틈이 체코, 폴란드, 헝가리, 핀란드 등 국외여행을 하며 견문을 쌓았다. “조경설계 일을 하는 동안 손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줄곧 그림을 그렸어요.” 87년부터 다시 붓을 잡았으니 화력 6년 만에 유명해진 게 이상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스스로 ‘인터내셔널 화가’라고 소개하느니 만큼 그의 그림에서 우즈벡 또는 고려인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까레이스키가 우즈벡과 고려라는 두 개의 고향을 가졌지만 예술에 국경이 있을 필요가 있느냐는 반문이다. 하지만 최근 타슈켄트 전시회에 낸 작품은 한글 자모와 태극기의 색깔을 응용한 것이어서 한국인이면 그림의 한국적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을 거라고 했다. 유럽인의 눈에 지방색으로 비칠 정도는 아니었다.

 

신 니콜라이(신순남) 안 블라디미르(안일) 등 정주 1세대한테서는 고려인의 흔적이 강렬하게 남아있지만 2세 이하에서는 거의 없다고 전했다. 1세대의 영향은 어느 선일까. “흉내로써는 영원한 2등밖에 되지 않습니다. 선배에 대한 존경과 작품활동은 별개죠.” 단호한 답이다. 원주민 우선의 우즈벡 사회에서 고려인 화가가 이름이 났다면 순전히 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고 했다.

“나의 조부모는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해요. 19세기 이전 할아버지가 산 시대와 땅의 역사를 알고 갈 것입니다.” 하지만 호텔에서 쉴 거냐, 빈예술사박물관전을 볼 거냐 선택지에서 후자를 택한 그에게 한국사는 부차적인 것이었고, 그것은 무척 당연해 보였다.

고려인 화가 7명의 작품 120여점이 걸리는 ‘까레이스키’ 전은 3일부터 19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에서 열린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