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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주 역사와 수난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7-10-01 00:00:00조회5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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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70년> (3)이주 역사와 수난

고려인 수난사의 산증인 블라디미르 박씨

(파르티잔스크<러시아 연해주>=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고려인 4천여 명이 살고 있는 러시아 연해주 파르티잔스크시 외곽의 한 마을에 재정착해 살고 있는 블라디미르 박(82) 할아버지. 그는 12세의 나이에 강제이주를 당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노동군'으로 끌려가 싸웠으며 1993년 고향에 정착한 고려인 강제이주 역사의 산 증인이다.

아버지가 강제이주 전 경찰에 연행돼 아직도 소식을 모른다는 그는 할머니와 어머니 김마리아(81세 작고)씨와 함께 단출하게 강제이주됐다.

현재 파르티잔스크 고려인 원로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 할아버지는 현지 고려인 문화센터를 찾는 한국 손님이나 고려인 후손에게 강제이주의 생생한 경험담을 들려주며 잔혹하고 비참한 역사를 잊지말라고 당부한다.

그는 기자에게도 이주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얘기를 하면서 때로는 말을 멈추고 창밖을 응시하기도 했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기도 했다.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 가족을 협박했고, 그 길로 기차역까지 끌려가 화물열차에 짐승처럼 실려 어디론 가로 출발했어. 소학교를 다니던 열 두 살 때였으니 생각이 다 나지"

70년이 지나 백발이 성성한 박 할아버지는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그 때 기차역에서 고려인 가족들이 소리지르며 통곡하고, 땅 바닥을 치며 '아버지, 어머니'를 외치던 가슴 아픈 기억이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고 증언했다.

"말과 소를 운반하는 화물열차 1칸에 80명 정도가 탔는데, 모두 32칸이었어. 콩나물 시루처럼 그야말로 빼곡히 실려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어. 화장실도 없고 물도 없었지"

박 할아버지는 "기차가 서면 일제히 뛰어내려 남녀 할 것 없이 기차 밑에다 대소변을 봤지만, 열차가 이동 중에는 한쪽에 뚫어놓은 구멍에 대고 볼일을 봤는데 그 냄새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모른다"고 회상했다.

지금도 지린내와 퀴퀴한 냄새를 떠올리면 구역질이 올라오면서 눈물이 쏟아진다고 말을 이은 그는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자 사람들은 기차가 서면 인가에 뛰어들어가 먹을 것을 빼앗다시피 해 얻어먹기도 했고, 결국 먹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도 있었다"며 "우리 칸에서 1명이 죽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고려인들은 집에서 아이를 받았잖아. 그래서 기차를 타고 가면서 아이를 낳기도 했는데, 아마 다른 민족 같았으면 산모와 아이를 다 잃었을 거야"

50여 일 동안 걸려 박 할아버지가 도착한 곳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시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 그는 다시 배를 타고 아랄해를 건너 '무이나크'라는 곳에 버려졌다. '흰 모래(소금)의 땅'이라고 불리는 그곳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살지 않는 황무지였다.

"소금벌판이니 농사를 지을 수 없었지. 그래서 우물을 파 경작지를 씻어냈어. 몇 달 걸려 소금을 제거하자 마침내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만들어졌는데, 이젠 씨앗이 없는 거야"

박 할아버지는 쪼글쪼글해진 손을 들어 보이며 "이게 그 때 고생해서 망가진 거야. 어린 나이에 참.."하며 고개를 떨어뜨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17세 때 러시아 노동군으로 강제징용돼 다시 짐승처럼 생활했다는 그는 "17세된 사람은 무조건 전쟁터로 끌고 갔는데, 고려인들도 무척 많았다"며 "(고려인들의) 이런 비참한 역사는 지구상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3년간 군복무를 한 그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와 1947년 타슈켄트 자원경영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후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을 했다. 1953년 허정임(2006년 작고)씨와 결혼해 1남1녀를 둔 그는 1992년까지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 페르가나시, 가르시 등에서 수로작업 등을 했다.

"아들이 파르티잔스크 인근에서 군 복무를 할 때 고향을 처음 방문했었는데 살기가 좋아졌더라구. 그래서 1993년 손자 3명과 함께 돌아왔어. 이제 내 마지막 소원은 고국에 가서 고려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숨쉬며 단 며칠이라도 살아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