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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주 역사와 수난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7-10-01 00:00:00조회52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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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70년> (4)이주 역사와 수난

한때의 영광으로 사라져가는 '성공신화' 김병화 농장
우즈벡정부, 농장 이름서 '김병화' 삭제

(타슈켄트=연합뉴스) 왕길환 김병규 기자 =

 

"(김)병화 선생이 고려인, 우즈벡 사람, 카자흐 사람 모두 잘살게 해줬는데 왜 이름을 치웠나(바꿨나) 다들 아까바하지(안타까워하지)"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된 뒤 탁월한 리더십으로 콜호스(집단농장)를 경영하며 현지인과 고려인 모두에게 존경을 받던 고(故) 김병화씨.

그는 1940년부터 1974년 사망하기까지 농장장으로 '북극성 농장'을 이끌며 매년 쌀과 목화 생산에 혁신적인 성과를 거둬 소련으로부터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소련 시대 우즈베키스탄 지방 정부 역시 이런 공로를 인정해 농장 이름을 '김병화 농장'으로 개칭했다.

이처럼 김병화 농장은 그동안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성공 신화의 상징이었지만 강제이주 70주년을 맞은 오늘날 이 농장은 이름까지 바뀐 채 황량한 모습이었다.

농장 입구에 달린 간판 역시 예전의 '김병화 농장'이라는 문구는 사라진 채 '용우치콜리 농장'이라는 새 이름이 달려 있었다. 용우치콜리는 이 지역의 우즈베키스탄식 이름이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2006년 협동농장을 해산하고 현지인에게 장기임대해 농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때 정부령으로 농장 이름을 바꿀 것을 명령했다.

농장 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김병화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 역시 현지어로 교명(校名)을 변경했고, '김병화 거리' 역시 김병화라는 자랑스러운 이름 석 자가 빠졌다. 그나마 10평 남짓한 박물관만이 '김병화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박물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는 고려인 라디운 장(71)씨는 "고려인들도 우즈벡인들도 관청에 '이름을 변경하지 말아달라'고 청원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김병화 농장이 개명된 것은 우즈베크스탄 정부의 '탈(脫) 소련' 정책에 기인한다. 이곳 정부는 대부분의 간판을 우즈베키스탄어로 바꾸고 공공기관에서는 우즈베키스탄어만 사용하게 하는 등 철저한 민족 정체성 확립 작업을 벌이고 있다.

장씨는 "기념관을 방문하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나 카자흐스탄 사람들 역시 왜 이름을 바꿨는지 안타까워하고 있다"며 "기념관에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지고 있고 (김)병화 선생이 점점 잊혀가는 것 같아 슬프다"고 말했다.

장씨는 이어 "박물관 이름마저 우즈베키스탄식으로 바뀔까 봐 고려인들은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북극성 농장'은 많게는 1천924가구, 7천823명까지 속해 있던 대규모 농장이었다. 이 농장이 두드러진 활약을 펼치자 지방 정부가 인근의 다른 농장 5개를 병합한 결과였다.

하지만 소련 붕괴와 함께 사정은 달라졌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제 발전이 부진한 틈에 1천500여명이던 농장의 고려인 중 상당수가 도시의 공사장으로 떠난 것이다. 농장 내 고려인들은 이제 800여명 밖에 남지 않았고 이마저 노인과 어린이가 대부분이다.

장씨는 지평선 너머로 넓게 펼쳐진 목화 농장을 가리키며 "그래도 (김)병화 선생의 정신을 후세가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병화 선생도, 우리도 일을 세게 했지. 아침 7시도 안돼서 일 시작해서 밤 9시가 돼서 끝났어. 그저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일했지. 그래서 고려인들 다 같이 잘살았어. 우리 고려사람들 병화 선생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