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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그들은 누구인가? text 2006 초판 버젼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18-03-14 22:09:51조회63회

“고려인, 그들은 누구인가?”
(소외된 고려인 동포에게 희망을!)
 

목 차
Ⅰ. 고려인 또 다른 이름의 한민족
Ⅱ. 항일독립운동의 주 무대였던
러시아 연해주와 꼬레 사람들의 애환
Ⅲ. 강제이주와 중앙아시아 정착 그리고…
Ⅳ. 연해주 재이주와 유랑하는 동포들
Ⅴ. 너희 나라에는 동포들의 귀국지원 정책이 없는가?
Ⅵ. 고려인 동포들의 현황과 정체성
Ⅶ. 민족의 자산이요 보배가 될 55만 고려인 동포
Ⅷ. 한민족의 저력 “시련과 역경을 기회로!”
Ⅸ. 우리는 역사의식이 있는가?
Ⅹ. 향후과제 - 민족 대화합프로젝트(생략)
 
 
 

Ⅰ.  고려인 또 다른 이름의 한민족
 
고려인의 역사 요약

․ 1863년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 고려인 동포 13가구 최초 기록
․ 1867년  185가구 999명
․ 1869년  한반도 북녘 대기근으로 이주 급증 1만 여명
․ 1902년  고려인 동포 이민자수 32,380명
․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의병기지화
․ 1908년 의병 건수 1,451건, 참가 인원 6만9천8백여 명. 연해주 총독의 박해로 의병              활동 만주이동
․ 1910년  경술국치 후 고려인 동포 이민 급증
․ 1914년  교민 수 6만3천명, 블라디보스톡에 신 한촌 건설
․ 1918    4월 일본군 연해주 점령
․ 1922년  10월 일본군 연해주 철수 친일 거류민단 5천명과 함께 귀국
․ 1923년  재소 고려인 동포 공식 10여만 명 거주. 실지 25만 명 거주
․ 1932년  연해주 고려인 동포 학교 380개. 잡지 6종, 신문 7종,
․ 1937년  9월 21일 -11월 15일.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이주 전 고려인 동포 지식인 2,500명 총살형)
․ 1953년까지 약 16년간 집단 수용소 생활과 같은 생활함
      (예: 민족교육 금지, 국가기관 취업과 취학 제한, 사회․정치적 진출도 사실상 봉쇄)
․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이 모든 제한은 비로소 완화되기 시작
․ 1991년 구소련의 해체와 독립 국가들의 탄생에 따라 새로운 이주와 유랑
 
또 다른 이름의 한민족 55만 고려인은 누구인가? 
  흔히 '카레이스키'로 알려진 고려인은 구소련 지역에 거주하던 한민족들이 스스로를 ‘꼬레사람’이라고 부르는 데서 기인하여 최근엔 중국의 조선족과 비교해  '고려인'이라고  호칭하는 데서 명칭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러시아어로 까레이츠(남자) 까레얀까(여자)로 불리던 재소지역 고려인 동포들은 지금도 스스로를 고려사람(꼬레사람)이라고 부른다.
 
고구려 발해시대 이후 1860년대부터 다시 시작된 북방개척이민은 일제에 항거한 항일 독립운동을 위한 무대로 자리매김 되면서 한 때 20만 명을 넘어서며 연해주에서 한민족시대를 다시 꽃피우는 듯 했다.
민족 운동가들의 선도에 의해 독립군기지로 이주한 동포들은 곳곳에 고려인 촌락을 건설하고 생계유지와 독립군에 대한 후원을 위해 여러 가지 산업 활동을 펼쳤다. 고려인 동포들 중 일부는 노동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콩·조·옥수수 등을 경작하였으며, 점차적으로 수로를 개발하여 벼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소작인으로 시작한 동포들은 극히 빈곤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럼에도 이를 이겨내고 굳건한 고려인 동포사회 및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0년 신한촌 대학살 참변과 우스리스크 대학살 참변 등의 일제의 잔인한 탄압과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에서의 고난을 극복하고 안정을 찾은 것도 잠시 1990년대 구소련의 해체와 신생독립국가들의 탄생은 고려인 동포들을 다시 유랑민으로 만들고 있으며 중앙아시아와 연해주를 포함한 러시아 전역에 55만 여명 이상의 동포들이 광범위하게 퍼져서 각개전투식의 정착노력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또한 고려인동포들은 다른 구소련 내 소수민족과는 달리 모국으로의 귀국지원프로그램도 없고 반겨주는 나라가 없기에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생존을 위해 유랑하거나 현지에서 정착하기 위해 오늘도 피와 땀을 쏟고 있다.
 
 
 
 
 
 
 
 
 
 
 
 
 

고려인 최초 정착 이미지와 분포도 첨가
이제 더 이상 고려인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넓고 넓은 북방의 하늘 아래
세계에서 제일 넓은 나라 러시아에
정말 바둑판의 바둑알처럼 흩어져 살고 있는 고려인들!
그들은 바로 이웃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이었습니다.
수난의 시대에 한반도를 떠나
남의 나라에서 설움 받으며 고통 받은 우리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 그들을 외면했었습니다.
아니 돌아볼 겨를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은 조국을 그리고 있습니다.
조국이 그들을 외면했던 것만큼이나 조국을 애타게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저는 잃어버렸던 우리민족 고려인을 만나
다른 나라 이방 땅에서 겪어야했던 그들의 수난사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55만 고려인의 아픔이자 현실이었습니다.
시대는 고려인을 외면했을지 몰라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고려인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고려인돕기 자원봉사자 수필집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 중에서
 
 
 
 
 
 
 
Ⅱ.  항일독립운동의 주 무대였던 러시아연해주와  꼬레사람들의 애환

고려인동포들의 역사는 부동항으로 유명한 블라디보스톡을 주도로 하는 러시아 연해주로부터 시작된다.
비행기로 2시간 반, 배로는 16시간 정도 걸리지만 실제로는 더욱 가까운 곳 극동 연해주는 한국의 고토(古土)이며 일제하 독립운동의 성지였으며 지금도 고구려, 발해,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운동 유적들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고려인동포들은 스탈린에 의해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기까지 약 70년간 연해주에서 생활하였다. 한국에서 살기 어려워 러시아로 이주한 농민들과 연해주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이주한 우국지사들의 이민이었다. 농민을 가장한 독립투사의 이동이었고 항일 운동을 하는 의병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도왔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합방 당하자 러시아에 거주하는 많은 고려인 동포들은 귀국을 포기하고 러시아로 귀화하기 시작했다. 순수 농민 이민의 성격은 정치적 망명객이 유입되면서 농민들도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의병활동을 하게 되었다. 의병에 참가한 수는 7만에 이르게 되었다. 의병군들이 조직한 단체로 13도의군 성명회, 권업회 등이 있다. 권업회는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하였다. 부장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고려인 동포 지도자들은 교육과 언론을 통하여 민족혼을 고양하기 위한 사업으로 문화 활동, 학교설립, 신문발행을 전개하였다. 연해주 고려인 동포학교는 11개가 있었고 사법학교도 설립하였다. 블라디보스톡 지역에만도 고려인 동포학교가 3개나  있었다.
1860년에서 1937년까지 20만 여명에 달하는 고려인 동포들이 생활터전을 잡고 살았다. 당시 고려인 동포들의 이주는 합법적인 것이 아니고 한국에서 살 수 없어 이주한 명실상부한 유민 이였다. 고려인 동포들은 러시아의 학대를 받으면서도 외국의 유민이었기에 모든 것을 감수하여야만 했다. 고려인 동포가 연해주에 정착하면서 크게 공헌한 것은 그곳에서 벼농사를 시작하고 쌀을 보급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연해주에서는 독립운동을 공공연히 할 수 있는 곳이고 특히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은 만주의 북간도와 연해주의 의병들이 무기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따라서 연해주는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볼셰비키혁명이 발발하고 연해주에 주둔한 일본군에 대항하여 유격전을 벌이고 러시아인을 도와주면 일본군을 격퇴한 후 한반도까지 러시아군과 협력하여 조국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고려인 동포 유격대들은 온 힘을 다해 러시아를 도왔고 항일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러시아군으로 종군했던 많은 우국지사들의 생명은 낙엽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일본군이 연해주에서 물러가자 러시아는 고려인 동포 의병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말았다. 항일 투쟁한 고려인 동포들은 러시아에서 배신감을 경험하게 되었다. 토착의 힘든 과정과 항일의 무서운 투쟁에서 고려인 동포들은 주어진 삶에 다시 정치적, 역사적으로 순응함을 배워야 했다. 연해주에서 어렵게 정착을 시작하고 고려인 동포들 중심의 농장에서 생활의 터전을 잡고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뺏기는 강제이주를 당하게 되었다.
민족의 영웅 홍범도장군은 연해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항일 독립 운동가이다. 한반도에서 맹활약을 한 후 연해주을 주 활동무대로 옮겼던 홍범도 장군은 항일 의병군의 총대장으로 이곳에서도 신출귀몰한 활약을 하여 훗날에 모스크바에서 레닌에게 권총을 직접 선물 받기도 하였을 정도로 소련정부에서조차 인정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도 스탈린의 사회주의 바람에 휘둘리며 1937년 강제이주 열차에 실려졌고 그로부터 6년 후,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의 시골 크질오르다 조선극장경비로 지내다가 머나먼 이방 땅에서 쓸쓸히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 속에 감추어졌던 장군의 공로와 행적이 밝혀지면서 항일독립투쟁사에서 최고의 민족 영웅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는 홍범도 장군 외에 연해주 크라스키노(안치하리)에서 단지회를 조직하고 거사를 위해 블라디보스톡에서 권총을 준비하여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였던 안중근의사, 계봉우, 장도빈, 강상진, 김규면, 김경천, 이범진, 이동녕, 이동휘, 이상설, 신채호, 이위종, 최봉설, 최재형 선생님 등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고 알고 있을 분들이 이 곳 연해주에서 활동하셨던 항일 독립 운동가들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 조명이나 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여전히 많은 독립운동 유적이나 역사자료들이 방치되어있거나 이곳 저곳에 묻혀있으며, 많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또 허다한 무명항일독립투사들의 후손들이 타국 타향을 떠돌며 대부분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분들이 안 계셨었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어떠한 모습일까? 바로 이분들의 정신과 혼이 대한독립을 이끌었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오늘에 이르게 했는데 우리의 역사는 여기에서도 또 한 번 단절과 굴절의 안타까움을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광복60년을 훌쩍 넘어버린 이 시대에 우리는 이제라도 더 늦지 않게 제대로 된 역사를 정립하고 고려인동포, 조선족 동포, 재미동포, 재일동포, 대한민국시민 구별 없이 전 세계 한민족이 어려울 때 더욱 하나가 되었던 항일독립운동의 애국애족애민정신으로 다시 하나 되어 진정한 한민족 웅비의 시대를 이루어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 어려움에 처한 동포를 돕고 협력하기위한 ‘고려인 돕기 운동’의 취지도 바로 이러한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참고 : 연해주에 있는 독립운동유적 관련 자료들
 
단지동맹기념비문
1909년 2월 7일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결사동지 김기룡(30세), 백규삼(27세), 황병(25세), 조응순(25세), 강순기(40세), 강창두(27세), 정원주(30세), 박봉석(32세), 유치홍(40세), 김백춘(25세), 김천화(26세) 등 12인은 이곳 크라스키노(연추하리) 마을에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단지동맹하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기 왼손 무명지를 잘라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하다.
신한촌 기념비문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성전이며, 청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성전의 요람으로 선열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곳이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당하자 국내외 지사들은 신한촌에 결집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필사의 결의를 다졌다. 성명회와 권업회 결성, 고려인 동포학교설립, 신문발간, 13도의 군 창설 등으로 민족 역량을 배양하고 1919년에는 망명정부(대한국민의회)를 수립하여 대일항쟁의 의지로 불태웠다. 그러나 한민족은 1937년 불행하게도 중앙아시아에 흩어지게 되고 신한촌은 폐허가 되었다. 이에 해외한민족 연구소는 3.1독립 선언 80주년을 맞아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재러-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며 후손들에게 역사 인식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이 기념탑을 세운다.”
이상설 선생 유허지 비문
 “보재 이상설 선생은 1870년 한국 충청북도 진천에서 탄생하여 1917년 연해주 우스리스크에서 서거한 독립운동의 지도자이다. 1907년 7월에는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이준, 이위종을 등을 대동하고 시행하여 한국독립을 주장하였다. 이어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헌신 중 순국하다.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물에 뿌리다.” 
“동지들을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고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원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
1917년 3월 2일 (48세) 우스리스크에서 작고하신 이상설선생의 유언

(각 해당 이미지 첨부)
 
 
祖國의 이름으로
시 인  이 유 진
여기,
신한촌, 페르사마 레치카 언덕에서,
말없이 흐르는 아무르강 강변에서,
빼앗긴 조국의 산하 다시 찾자고,
핏빛 맹서 사무치던 거리에서,
어디선가
눈물의 문풍지 소리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 모진 세월
별을 감아 내어 천년을 쌓는다 해도
햇살로 엮어 보일 수 없는
고독한 항쟁과 자유와 독립의 꿈과
속박의 철책 넘나들며
조국과 민족의 십자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지고
꽃잎처럼 산화해 가신 님의 하늘
생명과 역사의 끝없는 순환을 너머
소생의 물결로 민족의 가슴, 가슴마다
스며 계셔야 할 님이시여!
어느 우아한 신화가
임의 보배로운 조국애보다 더 아름다우리요?
물보다 더 진한 피가
이데올로기에 동강난 채
아직도 한반도는 방황의 늪을 헤매고 있고
우리는 모두 무정한 침묵의 배반으로
님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높푸른 하늘서 멀리                                             
조국을 향해 피울음 우시며
지금도 구천을 떠돌고 계실
고귀한 임의 넋
여둔 역사의 일곱 겹 위장 걷워 내고
임이 뜨거운 배달의 피
향기로운 제단에 아로새기며
오늘 우리는
임을 우러러 보옵니다.
조국의 이름으로.
 
 
Ⅲ.  강제이주와 중앙아시아 정착 그리고…

1937년 9월 21일~11월 15일.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고려인 동포들 전원은 중앙아시아(6천㎞)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다. 우즈베키스탄 16,272가구 76,525명 이주, 카자흐스탄 20,170가구 총 95,256명 이주, 총 36,442가구가 이주하였고 인구수는 총 171,781명에 달하였다. 
강제이주는 지식인의 사전 처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간 수천 명에 달하는 고려인 동포지도자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희생된 고려인 동포 지식인은 2,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곧이어 진행된 강제이주에 대한 통보 역시 출발 며칠 전에야 이루어졌다. 이주통보 이후 여행이 중지된 상황에서 거의 빈 몸으로 이들은 정든 땅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곡식의 씨앗은 잊지 않았다고 하니 고려인 동포들의 농사에 대한 집념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고려인 동포들은 억울하고 비참한 강제 이주를 당하면서 한마디의 저항도 심지어 불평도 할 수 없었다.
1937년 9월 연해주에서 겨우 안정을 찾아가던 동포들은 곧 추수하게 될 농작물과 수고의 땀이 무참히 짓밟히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고려인 동포들은 화물과 가축을 싣는 열차에 실렸다. 탑승자 전원은 아주 더럽고 깨어진 혹은 유리창이 없고 구멍 뚫린 열차에서 고통을 겪었다. 가족이 서로 다른 기차에 실리기도 하고 친지는 고려되지도 않았다. 강제이주 당하는 고려인 동포들을 실은 거대한 비극의 수송열차 행렬은 아시아 대륙 한 쪽 끝에서 시베리아 벌판을 지나 다른 끝으로 이어졌다. 수송열차는 행선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화물차와 가축운반차를 개조한 차량에 짐짝처럼 실린 이들은 매서운 시베리아의 삭풍 속을 한 달 여간 달려 중앙아시아에 도착했다. 열차에서는 먹을 것을 전혀 공급하지 않았고 기차가 석탄이나 물을 보충하기 위해 간간히 역에 정차하였으며, 기차내에 화장실이 없었으므로 역구내에 열차를 세우면 모두가 내려 대소변을 본다고 '역도 아닌 허허벌판'에 기차를 세웠다. 마른 음식을 계속 먹으며 고통을 겪다가 열차가 섰을 때 나뭇가지를 주워 불을 지피고 국물이라도 끓이려고 하면 열차가 떠나곤 하여 제대로 끓여 먹지도 못하였다. 40여 일 간의 여행도중 어린이 60%가 사망했다. 여행 중에 가족이 여러 열차로 흩어져 이산가족도 다수 발생하였고 사고도 발생하였다. 도착한 곳은 카자흐스탄 사막지대 우슈토베였다. 우슈토베에 도착한 그들은 이질, 장티푸스, 말라리아 같은 무서운 전염병에 1만 여명의 인명손실을 가져왔다. 그곳은 사막지역으로 겨울에 도착한 그들은 맨손으로 땅을 파 토굴을 만들어 그 속에서 그 혹독한 겨울을 나야 했다. 현재 그 곳 움막 토굴 옆에는 고려인 공동묘지가 있다.
고려인동포들은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한 후 수용시설이라곤 전혀 없는 허허벌판에 부려놓았다. 그 무서운 겨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1938년도의 인구표본조사를 보면 1천 명당 42명이 사망했으며 유아사망률은 20%나 되었다. 특히 고통스러웠던 기간은 이주 첫해 겨울부터 이듬해 농사를 짓기까지의 기간이었는데 토굴이나 창고, 마구간 등을 개조하여 겨울을 났으며 방바닥은 맨 땅이었다고 한다.
강제이주 이후 고려인동포의 거주이전은 제한되었다. 고려인동포들은 일정한 거주구역이 명시된 신분증을 소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적어도 1953년까지 약 16년간 집단적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족교육이 금지되었음은 물론 국가기관 취업과 취학에도 제한이 있었다. 사회․정치적 진출도 사실상 봉쇄되어 있었다. 이 모든 제한은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비로소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인동포들은 강한 불굴의 정신으로 주어진 시련을 이겨내고 새로운 땅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벼농사를 시작하여 우즈베키스탄은 주요 쌀농사 지역으로 변화하였다. 고려인동포들은 목화 등 다른 작물에서도 뛰어난 실적을 올리면서 빠르게 정착해 갔다.
전후 고려인 동포는 중앙아시아 개발에 앞장서 특유의 개척정신과 영농법으로 수많은 모범 콜호즈를 탄생시켰다. 소연방이 자랑하던 콜호즈는 대부분 고려인 동포 콜호즈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력영웅을 낳았음은 물론이다. 인구대비 노력영웅 비율은 모든 민족 가운데 최고를 자랑하였다.  “소련 전역에 걸쳐서 노력영웅은 모두 1천 2백 명 가량인데 그 가운데서 고려 사람으로서 노력영웅이 된 사람만 약 7백 50명쯤 된다. 그 중에서 우리 ‘스베르드보프 콜호즈’에서만 21명의 영웅이 나왔다. 단연 최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련했다 싶기도 하다.”(한운석동포의 증언 중에서) 아사와 죽음의 역경에서 오로지 노력하나로 전 소련의 모범적인 마을을 형성한 것은 고려인 동포들이 불행을 성실로써 극복한 대표적인 해외정착성공의 한 예라 하겠다.
1938년 11월. 우즈베키스탄공화국 농업부장 바꿀린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내놓았다.
‘타슈켄트의 고려인 거주 집단 농장은 대단히 높은 영농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은 거의 불모지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확을 거두었다.’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살았다. 맨손으로 갈대숲을 베고, 수로를 팠고, 늪을 말렸고, 땅을 갈아엎어 씨를 뿌렸다. 그리고 지푸라기와 갈대를 섞어 벽돌을 만들고 주택을 지었다. 강제이주의 악몽을 잊으려는 듯 고려인들은 죽음 같은 노동에 그들의 온몸을 던졌다.
1938년 강제이주 당한 다음해에 소수민족의 언어라는 점을 들어 한민족의 언어를 박탈했으며, 열악한 지역으로부터 그들이 이동할 것을 대비해 거주이전에 제한을 받았다. 또한 적성민족으로 낙인이 찍힌 불우한 상황에서 그들은 농부로 성공하였고 쌀과 야채를 공급하는 농업으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1970~1980년대에 이르러 드디어 일반 노동자들의 10배에 이르는 높은 소득을 올렸고, 소련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전문인으로 활동하는 고려인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작가 아나톨리 김, 가수 율리 김과 빅토르 최, 성악가 넬리 리, 체조 선수 넬리 김 등은 세계가 인정하는 고려인들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이제 다리를 뻗으려나 했다. 이제 손자 손녀 웃음보며 지나온 악몽을 먼 옛날 얘기로 묻으려나 했다. 그러나 역사는 이들을 다시 한 번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다. 60여 년의 세월, 뼈가 부서져라 일하고 등이 굽어라 일한 그들에게 역사는 죽음 같은 고난의 길을 예비해놓은 것이다.
생활의 안정과 기반을 잡은 후세대들이 중앙아시아를 제2의 고향, 제2의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던 시절, 1991년 민족 간의 갈등이 터져 나오며 소련은 붕괴됐다.
이제 러시아어를 사용해서도 안 되며 소련 시절의 어떤 훈장도 소용이 없게 됐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심지어 내전이 일어났던 타직키스탄 지역과 사막화로 인해 정든 땅을 떠나야만 했던 아랄해 인근의 고려인들은 ‘난민’ 신세가 되기까지 했다.
독립 국가들은 자국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민족 차별정책을 가속화해 고려인들의 숨통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결국 고려인들이 생산하는 농산물과 가축은 어디서도 판매할 수 없게 되었고, 오로지 러시아어만을 사용했던 고려인들은 그 나라의 말을 모른다는 이유로 취업의 길마저 가로 막혔다. 더구나 대부분이 공무원, 교사, 의사, 연구종사자, 집단 농장장 등 전문 분야에 종사하고 있던 고려인들이라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그렇다고 단기간에 그들의 언어를 습득하여 재취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이었다. 심지어는 집과 재산을 버리고 떠나라는 협박편지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전문직 종사자들은 단순 노동자,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로 가란 말인가?
서글퍼라! 60년 그 피 같은 청춘을 쏟아냈던 고려인들에게 돌아온 현실은 남의 집 처마 셋방살이의 현실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것이었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수십 년간 피와 눈물로 쌓아놓은 터전을 버리고 어디로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가?
 
공 화 국 명
숫자(명)
중앙아시아지역
우즈베키스탄
 183,140
카자흐스탄
 103,315
아제르바이잔
 94
키르기즈스탄
 18,355
타지크스탄
13,431
투르크메니아
2,848
여타지역
러시아
 107,051
우크라이나
8,669
백러시아
 638
그루지야
 242
리투아니아
 119
몰다비아
 269
라트비아
248
아르메니아
29
에스토니아
202
  (1989년 구소련 자료)
 
 
 
 
 
 
Ⅳ.  연해주 재이주와 유랑하는 동포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동포들에게 또 다시 불행이 닥쳐온 것이다. 1991년 소련의 붕괴이다.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민족공화국이나 자치공화국을 갖는 민족은 보다 많은 자유를 보장받았으나 자치구도 없는 소수민족의 경우 새로운 민족 정책은 오히려 고통을 가중 시키고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을 알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중앙아시아 여러 공화국에서 전개되는 자국어사용은 고려인 동포들에게는 한국 언어뿐 아니라 그동안 사용해온 러시아어마저 통제를 받는 경우가 되어버렸다. 자민족 우선주의로 인해 고려인 동포가 다수 거주하던 콜호즈에서도 고려인 동포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고려인 동포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콜호즈가 원주민의 손에 거의 다 넘어갔다.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 동포들의 보다 구체적으로 느끼는 위기는 경제적 위기이다. 구소련의 전체의 경제체제가 악화되면서 생산중단, 유통의 마비로 집단농장인 콜호즈와 소프즈의 붕괴가 시작했다. 구소련의 고려인집단 농장은 단순한 생산 집단이 아니다. 이들의 일상생활, 여가, 의례, 교육문화의 전 생활이 공동체이며 운명의 공동체이다. 콜호즈와 소포즈로 대표되는 집단농장의 와해로 인하여 경제와 생활근거를 동시에 상실하게 된다. 현지 민족어를 몰라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해직 당하거나 좌천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학교에서는 고려인 학생을 구타하고 욕을 하면서 “너의 나라로 가라!” 노골적으로 핍박을 받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은 호소할 곳이 없었다. 주유소 등에서도 고려인 동포들은 ℓ당 요금을 더 요구받기도 했다고 한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황야로 내팽개쳐졌던 이들의 기구한 삶은 이제 내전과 민족주의로 다시 위태로워졌다.
91년 12월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중앙아시아 C. I. S 국가들이 독립하고, 독립 국가 고유의 언어를 쓰는 정책과 소수 민족에 대한 회교 민족주의로 인하여 상당수의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를 떠나고 있으며 원거주지였던 극동 러시아, 그중에서도 연해주를 중심으로 언어가 한층 자유로운 러시아로 이주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연해주의 인구는 230만 명이며 90% 이상이 러시아인이다.)
특별히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하는 동포들의 이주이유 중의 하나인 언어의 경우 중앙아시아의 각 민족공화국이 독립 이후 자기민족의 언어를 러시아어 대신 공화국내 공식 언어로 채택함에 따라 여타 소수민족들은 러시아어와 공화국 민족어, 그리고 자기 민족어를 습득해야 하는 3중 언어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의 차원을 넘어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을 야기하고 있다. 고려인 동포와 같은 소수민족은 거주국의 민족어를 배우지 않을 경우 모든 면에서 차별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고려인 동포가 공식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고 있다. 특히 고려인 동포들은 대부분 공무원, 교사, 의사, 연구종사자, 집단농장장 등 사무직 또는 관리직에 종사하고 있어 사태는 더욱 심각한 지경이다. 이러한 실직자들이 단기간에 공식 언어를 습득하여 재취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까닭에 상황은 비관적이다.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자영업 또는 자영농에 종사하거나, 단순노동자 또는 도시빈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만이 현지진출 한국기업에 취업할 기회를 얻고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요인은 회교도 자민족 중심주의의 확산인데, 이는 때때로 폭력의 형태를 띠고 있어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려인 동포의 경우 여타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수가 이 지역을 떠났으며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주자 다수가 러시아로 향하고 있으며, 그 중 일부가 연해주로 재이주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라별로는 타지키스탄 고려인 동포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이 지역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며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동포가  많이 떠난 것으로 통계되고 있다. 실제로 연해주 재이주자 중에도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출신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중앙아시아의 민족주의와 경제적 위기, 언어의 문제, 정치 사회적 불평등 문제 등으로 인해 많은 고려인들이 러시아로의 이주를 원하고 있지만, 중앙아시아 화폐 가치의 하락과 고려인 동포들이 대다수 거주하던 중앙아시아의 각국과는  서로 다른 나라가 되어버린 러시아에서는 까다로워진 국적법과 외국인 관련법 그리고 격변하는 정세 등이 새로운 변수로 작용하여 이주하려는 고려인 동포들이 불법체류자나 무국적자가 또는 국제미아가 되어버리는 현상이 속출해 왔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재이주의 규모나 속도는 중앙아시아의 상황변화와 연해주를 포함한 러시아 여러 지역에서의의 고려인 정착 성공가능여부, 외국인관련법, 국적법, 경제 환경 등 제반 여건의 변화에 따라 유동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다만 최근에 뚜렷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는 재이주를 원하는 지역이 조상들의 고향인 연해주지역이나 고본질이라는 대륙이동식 농업으로 부를 축적하기를 기대했던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볼가강 유역 등의 농업중심지역 으로의 이주 보다는 우선 러시아어문화권이면서도 상업위주의 경제활동이 활기를 띄고 있는 러시아의 모스크바, 샹트 빼쩨르부르크,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키르기즈스탄의 비쉬켁 등으로의 이주가 더욱 많아지고 있으며, 대한민국 남성과의 결혼 등의 이유로 고려인 여성들의 경우 한국으로의 이주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2006년 후반기부터 시행될 방문취업비자제도로 인하여 향후 매년 상당수의 고려인동포가 한국에 입국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이나라 저나라에 유랑하는 고려인 동포들과 향후 적지 않은 수의 동포들이 대한민국에 입국할 텐데 이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나 시민의 인식수준은 거의 무지상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려도 되지만 (사)고려인돕기운동본부 등의 시민단체의 역할이 기대되기도 한다.
부언하여 설명하면 이 방문취업제도는 고용허가특례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재중 및 재소 지역의 동포들에게 출입국과 취업에서의 불편을 최소화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강한 진일보한 제도로 평가된다. 그러나 고용허가특례제도와 마찬가지로 방문취업제도 역시 기본적인 관점상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들 제도는 조선족 및 고려인 동포에게 취업 등에 있어서 실질적인 혜택을 부여할 수는 있더라도, 재외동포법상의 재외동포체류자격은 부여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전제위에 서 있다. 특히 방문취업(H-2)비자는 그 성격이 “단순노무행위”를 제외하고는 재외동포(F-4)비자와 실질적으로 동일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체류자격을 구분하여 조선족과 고려인 동포들을 재외동포법의 적용대상에서 배제하는 기존의 정책과 원칙을 일관되게 고수하고 있다. 취업과 출입국상의 실질적 혜택을 부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조선족과 고려인 동포들을 역사와 인권, 법 적용의 관점에서 정당하게 재외동포로 인정하여 체류자격(F-4)을 부여하고 법과 정책의 보편성, 형평성을 확립하는 것일 것이다. 이 방문 취업제도는 재외동포법의 제정 및 개정취지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며 우리사회가 공동으로 떠 맡아야할 과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내 집 처마 밑으로 제비들은 날아오는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에도 소개되었던 연성용 시인(당시 83세) 그는 또 한번 겪는 이 혼란의 세월을 ‘시마저 쓸 수 없는 땅’이라고 표현했다.
“비극입니다. 비극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제 나라가 있어 그곳에 갈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외지에서 발붙이고 살아본들 쫓기고 쫓기는 생활, 이것이 비극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스물일곱에 연해주에서 강제이주 화물차에 몸을 실었던 그는 이제 다시 짐을 꾸려야 하는 이 말년의 고통이 어디서 연유하는가, 두 눈을 모으고 가슴을 끌어 당겨보아도 답이 없다고 눈물짓는다.
여전히 자식들을 키우고 살아야 할 사람들, 여전히 삶을 이어가야 할 그들은 오늘도 날선 벼랑 끝에 서서 갈 곳 몰라 하고 있는 것이다.
노시인은 꿈을 꾼다. 어린 시절 마당가를 뛰며 놀던 고려인 동포들의 마을을 그리며, 가슴으로 목메어 부른다.
오 수남촌아!, 오 수남촌아!.
오 저주한다
스탈린의 개인숭배
수많은 무죄한 사람들을
살해한 그 죄악
때때로 잊지 못할, 용서치 못할 죄악
오늘도 나는 수남촌을 회상한다
텡텡 빈집들 열어 제낀 창문들
어데로 우리를 두고 가느냐고
눈마냥 우리를 바라보며
묻는 듯하였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잊혀지지 않는 그 이름
오 수남촌 수남촌아
보고 싶은 마음은 끝없어라
정든 내 집 처마 밑으로
제비들은 해마다 날아오는지
내 심은 수양버들은 얼마나 컸으며
살아 있기나 한지
정든 수남촌아, 고향 마을아.
 
 

형 찾아 수만 리 유랑을 떠나 온 김 왈레리 씨
노보네즈너 정착촌에 살고 있는 김 왈레리 씨는 형을 찾아 수만 리나 떨어진 연해주를 찾아온 사람이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1990년 그의 형님이 결혼하여 살고 있는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내전이 발발한 것이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본 결과, 형님은 전쟁을 피해 연해주로 갔고 그곳 스파스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왈레리 씨는 무작정 가족을 이끌고 연해주로 왔다. 형이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 기차로 꼬박 일주일이 걸리는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이다. 그러나 스파스크에도 형은 없었다. 그곳에 남아 있는 형의 흔적은 모스크바 어딘가로 돈 벌러 떠났다는 말뿐이었다. 형수에 대한 소식은 더욱 암담한 것이었다. 매일 밤마다 들려오는 포탄과 총소리에 심장이 약해진 형수는 연해주에 와보지도 못하고 기차 안에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조카도 오래 전에 어디론가 돈 벌러 갔다는 소식만 남아 있었다. 말 그대로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엄마 찾아 삼만 리’가 아니고 ‘형 찾아 수만 리’를 달려온 김 왈레리 씨 가족은 이곳에 오기 전에는 꽤 잘 살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큰 농장을 가지고 있어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왈레리 씨는 “여기서는 먹고 살기도 힘들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헐값에 가산을 정리하고 연해주로 온 데다, 첫해에 전 재산을 투자하여 지은 농사가 그만 흉작이 되는 바람에 가산을 완전히 탕진해버린 것이다.
그의 아내는 고된 농사일을 하느라 약해진 몸으로 재배한 작물을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2시간이나 떨어진 블라디보스톡까지 매일같이 기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고 있다.
왈레리 씨의 큰아들 지마는 열일곱 살인데, 공부에 전념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있는 시간보다 밭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특히 여름철 농막에서 밭을 지키는 일은 지마의 몫이다. 지마의 꿈은 한국어를 배워 통역관이 되는 것이라는데, 그 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작은아들 블라직은 이제 겨우 열 살인데도 역시 밭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이 두 아들이 왈레리 씨에게는 소중한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식구대로 나서서 너무나 애를 쓰는데, 노력하는 것에 비해 수확이 잘 따라주지 않아 안쓰럽기만 하다.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들이 다 그렇듯, 우즈베키스탄 여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들 가족의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형을 만날 수 있다는 일념 하나를 가지고 찾아온 이곳에서 김 왈레리 씨는 아직까지 정착마저도 못하고 있다.
과연 연해주는 재이주 고려인에게 또 다른 삶의 터전이 될 수 있을까.
                                                                         
 
자원봉사활동가 수필집 중에서
Ⅴ.  너희 나라에는
동포들의 귀국지원 정책이 없는가?

구소련의 와해로 인하여 국내의 정치적 상황이 불안해지고 경제적 혼란이 야기되자 국외에 자기의 조국을 가진 민족들은 자기나라로 돌아가고 있다. 독인인, 유태인, 폴란드인, 알메리아인 등은 러시아를 떠나고 있다. 독일과 유태인은 그들의 본국에서도 교육과 재원을 받고 돌아간다고 한다. 1937년 이후 1991년까지 60년이 지난 고려인들은 역경 속에 일구어 낸 제 3의 나라에서 빈손이 되어 유랑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의 민족주의 운동은 고려인 동포들에게 생활근거를 없애는 것이 되어 고려인 동포들은 60년간의 노력도 허사가 되고 큰 혼란 속에 빠진 것이다. 조국이 둘이나 되면서 갈 곳 없는 고려 사람들은 거의 버려진 해외동포가 되었다.
2001년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아 3년 이상 논란이 되었던 재외동포법은 재외동포들에게 출입국과 체류는 물론 부동산, 금융 등 경제 분야, 의료보험-연금 등 복지 분야에 이르기까지 내국인과 거의 동등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다. 그러나 문제는 실질적으로 재외동포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열려져있는가 하는 것이며 실제로 2005년 말까지 법무부 통계를 보면 55만 고려인 동포의 경우 재외동포로 인정을 받은 숫자는 특별한 몇 십 명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 개정된 재외동포법의 맹점이 있는 것이다. 2004년 3월에 개정 발표된 재외동포법 제2조 2호에는 재외동포 '정의' 부분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국외로 이주한 동포'도 포함하는 내용으로 개정했다. 이로써 지난 99년 8월 재중동포 조연섭씨 등 3명이 "재중동포를 차별하는 재외동포법은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한 지 만 5년 만에 재외 동포법 문제는 일단락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새롭게 개정된 재외동포법의 재외동포의 개념적 정의를 2항에『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대한민국정부 수립 이전에 국외로 이주한 동포를 포함한다) 또는 그 직계비속으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자중 대통령령이 정하는 자(이하 “외국국적동포”라 한다.)』라고 함으로 1948년 이전 외국 이주자들도 ‘외국국적 동포’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문제는 이 법에서의 자유왕래 등의 실질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을 ‘부모의 한쪽 또는 조부모의 한쪽이 한국 국적을 보유했던 자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자’로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 규정을 따를 경우, 국내 호적제가 시행된 1922년 이전에 중국과 러시아 등으로 이주한 동포의 후손들은 법 적용을 받을 길이 없다.
또 22년 이후 이주했더라도 일제 치하의 호적부에 이름을 올리기를 거부했던 항일투사 등의 가계나 ‘호적’ 등재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북한 출신 동포들도 배제되어버리는 문제가 생긴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재외동포 정책과는 달리 구소련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으로 강제 이주된 경험이 있고 자국 민족을 보유했던 외국의 선례를 보면 이스라엘은 구 소련시절부터 유태인의 출국과 정착을 지원하여 100만 명에 가까운 러시아 유태인을 포용하고 있다. 독일은 통독의 부담을 무릅쓰고 40만~50만 명의 러시아 거주 독일인을 받아들였다. 그리스까지 압하지하 내전 시 그리스-로마시대에 흑해 연안에 이주한 그리스 후손을 받아들였다. 폴란드나 터키 등 그 외 대부분 나라들도 자국민들에게 귀국할 경우 국적을 부여하고 정착지원금까지 주고 있다. 따따르 민족처럼 나라가 없어졌지만 cis권에서 당당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민족의 경우는 논외로 하더라도 고려인 동포들은 유독 자기 민족의 나라는 있지만 모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주 우즈베키스탄 문하영대사는 이런 질문을 독일대사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당신네 나라는 해외에서 유랑하는 동포들을 본국으로 귀환시켜주는 정책이나 제도가 없는가?” 이 질문에 마땅한 대답을 할 수 없어서 당황스러웠다는 문하영대사는 대한민국의 재외동포정책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우리 고려인이 이렇게 값이 없단 말이오!
 육순의 아주머니가 짊어지고 있을 삶의 무게가 간단치 않음을 그저 잠시의 시선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나이 든 할매가 물 긷는 것이 진짜로 바쁘오(어렵소).”
바로 그곳, 전기도 수도도 없는 그곳에 암으로 사경을 헤매는 그녀의 남편 김일랴 할아버지(당시 62세)가 누워계셨다. 복수가 차올라 배가 얼굴을 덮었고 누렇게 뜬 얼굴은 이제 그가 가야 할 길을 이미 떠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지켜보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고통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김일랴 할아버지는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고려 사람이 이렇게 값이 없단 말이오? 그 흔한 마우자(러시아인)병원 한번 가보지 못했소.”
우즈베키스탄에서 재이주해 온 그들에겐 그쪽 여권이 그들의 신분을 알리는 전부일 뿐, 그조차도 러시아 국적이 아니어서 병원 한번 가보지를 못했다니 이보다 기막힌 사연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사람의 값이 없다”는 할머니의 말처럼, 그랬다. 러시아 땅 어디든 고려 사람은 아무 값이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해야 했고, 아무리 아파도 병원 한번 가지 못했고, 죽어도 말할 데가 없었고, 아무리 오랫동안 살았어도 발붙일 곳이 없었다. 그렇게 값이 없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건만, 왜 이토록 남의 땅 문간방 신세를 면할 수 없느냐는 그들의 외침은 그래서 가슴을 파고든다. 정말 왜 이토록 고통스럽게 그들은 오고 가는가 말이다.
얼마 전엔 고려인 이주 1세대 김일랴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있었다. 다행히 한국에서 온 자원봉사 학생들의 도움으로 장송곡도 준비하고 악기도 준비해 장례를 치러드렸다. 유가족들은 이런 장례식은 처음이라며, 이렇게 ‘호사한’ 장례식은 처음이라며 눈물을 보였다. 기껏 가시는 걸음에 음악 한 자락 소중히 덧붙인 것뿐인데, 그것이 호사란다. 이곳에선.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시신을 모실 영구차도 상여도 없이 그저 큰 트럭 한 대가 도착했다. 그 차로 고인을 모시는 것이란다. 가시는 걸음마저 어찌 이리도 서러운가. 학생들도 우리들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거적 데기 둘둘 말아 보내는 전쟁 통도 아니요, 달리는 기차에서 잠시 묻어드리는 것도 아닌, 그래도 살던 터전에서 보내는 것인데 어찌 영구차 하나 없는 장례식이 있단 말인가 말이다.
일생 땅을 일구며 고생했을 그의 몸이 이제 고단한 인생을 내려놓은 순간까지 이토록 허전하고 서글플 수가 없다.
고국 땅 한 번 밟아 보는 것, 그게 내 소원이오!
크레모보에는 가끔 혼자 사는 분들이 보인다. 이런 저런 사정들이 있을 것이나 대부분이 일종의 ‘사전탐색’ 형태로 먼저 재이주해 오신 분들이다. 더구나 대부분 남자 분들이 혼자 와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살림살이가 말할 수 없이 어렵고 비참해 들여다보기가 송구할 정도이다.
최 루돌프 아저씨의 살림살이도 그랬다. 정착촌 그 차가운 마룻바닥에 가난을 꼭 닮은 이불 한 장과 냄비 몇 개가 살림의 전부였다.
“내가 선발대지.”
1년쯤 지났을까, 루돌프 아저씨네 가족이 모두 이주해왔다. 부인과 세 아이들 윗짜, 불라직, 샤샤. 아이들은 그 천진함만으로도 예쁘지만, 이 가정의 세 아이들은 정말로 너무나 귀엽고 예쁘게 생겼다. 함께 오신 올랴 할머니는 배고프고 추워도 귀여운 손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표정이었다.
할머니의 얼굴은 고려인 노인들이 모두 그렇듯 살아 온 세월의 무게만큼 깊은 주름을 새기고 있었다. 강제이주 당시 이곳 연해주에서 태어나 살았다는 할머니는 다시금 찾아온 이 땅이 그나마 반갑단다.
“참 내 고향은 아니지….”
말끝을 흐리는 할머니의 눈빛은 아버지의 고향, 야트막한 산과 내가 흐르던 그 땅을 그리는 듯 아득하다.
“그래도 내 고향은 다른데 있지. 여기가 어떻게 내 고향이우.”
“내 소원은 그저 조국 땅 한번 밟아 보는 것이오. 그 땅 밟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소.”
순간 명치끝 어딘가가 아려오는 느낌이다. 조국은 무엇인가. 민족은 무엇이며 내 땅은 무엇인가. 그 오랜 세월을 유랑하고 지냈으면서도 여전히 내 고향은, 내조국은 한반도다 말하는 이 노인의 심정은 과연 무엇인가. 눈물이 난다.
사실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국은 무슨 의미일까. 내 땅에서 숨 쉬고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그들은 알 수 있을까. 옛말에 ‘수구초심’이라 하여 여우도 죽는 순간에 고향을 향해 죽는다 했던가. 하물며 사람은 오죽할까. 내 나라를 떠나 온 이들에게 고향 땅을 밟아 보는 것은 이제 생의 마지막 소망이 되고 있다. 그들의 살날이 많지 않기에 그 소망은 더욱 간절한 것이리라.
 
 
자원봉사활동가 수필집 중에서
Ⅵ.  고려인 동포들의 현황과 정체성

조선조 말엽부터 20세기 초반, 지지리도 용렬 맞고 기구했던 조국의 근대사는 배달의 겨레들을 두 갈래로 나눠보냈다. 한 갈래는 남부여대 북으로 향해 원동(러시아 연해주, 프리모리야)에 이르렀고, 한 갈래는 강압에 끌려 남쪽으로 바다를 건넜다.
 세상사 참으로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던가. 남으로 끌려간 피붙이들은 그래도 그 땅의 국력과 함께 세월이 지나면서 대부분 자수성가를 이룩했다. 하지만 항일(抗日)에 불타서, 혹은 가난에 찌들어서 두만강 건너 북으로 흘러간 혈족들은 아직도 아시아 곳곳을 정처 없이 떠도는 유민(流民)의 신세를 면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천하가 다 아는 악몽 같은 원동에서의 강제이주,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불모지를 개간해서 목화를 심고 벼농사를 지어 근근이 안착하던 그들은 또 다시 살기 위해 원동으로 우크라이나로 러시아로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가고 있다. 진정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운명의 장난일까,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다.
 그렇다. 그들은 분명 한민족의 현대판 다이아스포라(diaspora)이다. 아니 정착민 다이아스포라가 아니라 지금도 가난의 지역을 떠도는 유민(流民)이다. 망국의 유민이 아니라 엄연히 조국이 존재하는 기구한 운명의 복 없는 유민들이다.
 희망이 있으면 가난도 서럽지 않다. 미래가 있으면 오늘의 역경이 두려울 리 없다. 하지만 구소련 연방 지역의 고려인(까레예쯔, 속칭 까레이스키, ‘고려사람’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기도 함)들은 사정이 다르다. 가난한 나라, 민주정체가 확립되지 못한 땅에 살게 된 죄로 그들은 희망과 미래를 유보할 수밖에 없다. 강제이주 3세대 4세대라는 연륜이 쌓였지만, 아직도 고려인들은 괴나리봇짐으로 황야를 떠돌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 700만에 달하는 재외 동포를 150개국에 갖고 있다. 재외 동포 수로는 세계 3위, 본국 인구와의 비례는 세계 1위라고 한다. 이중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고려인 동포들의 이주는 최초의 해외이주그룹에 속한다. 동포들은 1860년 경 조선시대 말 가난을 피하여 자발적인 이주를 시작했으며, 이것이 근세 대륙으로 다시 진출하는 대륙으로의 이주 개척의 역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특히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인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망국의 한을 안고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광복의 전진기지를 구축하는 무대가 되었으며 이주민들은 20만에 달하였다. 이들은 1937년 스탈린 강제이주의 수난과 소련시절 민족정체성의 말살과 1991년 구소련의 해체라는 역사적 시련과 전기를 맞이하면서 오늘날 유라시아 대륙에 흩어져 55만에 이르고 있다.
고려인 동포문제를 더듬어 보며 가슴 아픈 역사적 사실은 CIS국가 내 러시아인, 독일인, 유태인, 폴란드인, 그리스인 등의 대부분 타민족들은 정착지원금까지 주면서 모국에서 반겨주는데 고려인동포들만은 유독 고국에서 반겨주지 않고 있으며 어느 곳에서도 환영해 주는 곳이 없고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하는 냉혹함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처지에서 고려인 3세~5세 등 신세대들은 역사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어떻게든지 적응하며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의 유랑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로 인해 가족해체현상은 심각해지고 우리말과 문화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그리고 노인세대들은 구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연금과 독립국가 연합 각 국가의 낙후된 경제적 현실로 인해 생활 자체가 곤란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유라시아 대륙에 방대하게 흩어진 55만 고려인 동포들은 새로운 희망과 돌파구로 한류열풍으로 떠오른 모국 대한민국에 큰 기대를 하기도 한다.
또 하나 고려인 동포들의 현안과제 중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국적상실과 불법체류자 등의 법적안정성보장 문제이다. 임시거주자나 불법체류자 또는 무국적자 신분으로는 아무런 의료혜택도 교육법상의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2004년 러시아 정부의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러시아에는 현재 14만 8000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러시아 전역에 분포돼 있는 고려인은 19만 명에서 20만 명 정도인 것으로 러시아 대사관은 추정하고 있다. 통계에 잡혀 있지 않은 4만 명 이상은 지난 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러시아가 아닌 독립 국가들에 퍼져 살고 있던 고려인들로, 새로운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채 소비에트 연방 여권을 지니고 살고 있거나, 독립 국가에서 새로운 국적을 취득했지만 현재는 러시아에 입국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러시아 법에 규정된 거주등록을 하지 않은 사람들인 셈이다. 러시아 정부 통계에 잡히지 않은 4만~5만 명에 이르는 고려인들은 대부분 국적이 불안정한 불법 체류자나 임시거주자 신분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6년 초 개정된 러시아의 국적법(06.1.3 발효)이 국적취득조건의 한시적인 예외규정을 두는 등 고려인동포에게 상당히 유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국적법(14조4항) 일부를 개정, 국적 취득 신청기한을 2006년 1월 1일에서 2008년 1월 1일까지 2년 연장했다. 즉, 고려인들도 2002년 7월 1일 이전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입국했거나 2008년까지 임시거주허가를 받은 사람들의 국적 취득길이 열렸으며 절차도 간소화 되었다. 하지만 이법은 한시적인 규정이며 신정책에 따라 이민법, 국제법 및 외국인 관련법 등이 어떻게 개정되느냐 여부에 따라 여러 가지 변수가 예상되며, 국적법 규정에 의해 혜택을 받는 대상자는 적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적법체류자격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동포는 국적법 개정으로 당장 혜택 받을 수는 없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1. 독립국가연합(CIS) 동포현황(단위 : 명)

1997
1999
2001
2003
2005
구성비(%)
러시아
98,918
153,400
156,650
187,957
190,671
35.79
우즈베키스탄
220,350
181,241
230,800
230,860
200,917
37.72
카자흐스탄
103,653
113,000
99,700
101,972
103,676
19.46
키르기즈스탄
16,650
20,000
20,000
20,378
20,394
3.83
우크라이나
8,792
8,939
8,958
12,904
13,111
2.46
투르크메니스탄
 -
2,500
2,500
365
420
0.01
타지키스탄
 -
6,228
1,550
1,756
1,783
0.33
벨라루스
1,005
1,200
1,200
1,212
1,327
0.25
몰도바
351
269
256
234
285
0.01
그루지아
255
50
50
20
20
-
아제르바이잔
100
20
20
54
63
-
아르메니아
30
10
10
20
30
-
합  계
450,104
486,857
521,694
557,732
532,697
100
자료: 외교통상부(2005. 8.)
2. 고려인단체 조직현황
국가
단체조직현황
러시아
45개 지역 81개 단체 : 러시아 고려인연합회 등
우즈베키스탄
27개 지역 44개 단체 : 우즈베키스탄 고려문화협회 등
카자흐스탄
18개 지역 32개 단체 :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등
키르기즈스탄
1개 지역 5개 단체 : 키르키즈스탄 고려인협회 등
우크라이나
15개 지역 19개 단체 : 우크라이나 고려인협회 등
자료: 2004 동포단체조직현황, 외교통상부

지  역
합  계
지  역
합  계
우수리스크
15,400
핫산스크
120
파르찌쟌스크
3,000
쉬키톱스크
320
나호트카
3,000
나제진스크
200
블라디보스톡
2,000
라좁스크
100
아 르 쫌
2,000
올긴스크
50
스파스크달리
1,000
아르세니에브
328
달녜고르스크
160
아누친스크
50
아르세니예프
328
카바렐롭스크
120
례쏘자보드스크
420
크라스노아르메이스크
50
키로프스크
80
옥쟈빌스크
200
호롤스크
40
떼르네이스크
60
한카이스크
20
우졔브스크
80
체르니곱스크
500
야콥렙스크
65
미하일롭스크
400
연해주 전체
30,091
      출처:[연해주고려인협회] 제공,1998
쌀 한줌 얻을 수 있을까요?
정착촌에 도착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쌀 한줌 얻을 수 있을까요? 몇 주 동안 쌀 구경을 못했어요.”
유가이(유) 안나 아주머니와의 첫 만남이었다. 오죽했으면 얼굴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한 끼 쌀을 구하는가 싶어 마음이 서글퍼졌다.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청하니 미안한 듯 선뜻 걸음을 옮기시지 못하는 모습이 순박하게 보였다. 들어오시라는 아내의 간곡한 청에 겨우 한걸음을 옮기신 아주머니는 소매 춤 한 자락으로 쓰윽 눈물을 닦고 당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아주머니에겐 유난히 공부를 잘하는 클라바라는 딸이 있는데 지금 우수리스크 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남편이 병으로 드러누워 거동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딸의 학업을 포기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장학금을 받고 다니지만 도저히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는 형편이라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몇 주간 단 한 톨의 쌀도 구경을 못했을까.
안나 아주머니는 겨울이 되면 삐라스키와 팬시를 팔아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삐라스키는 한 개에 6루블(300원)에 판매되는 러시아식 구운 빵으로 빵 속에 양배추, 감자, 고기, 계란을 넣어 4종류로 만들고, 팬시는 양배추, 고기, 감자를 넣어 만든 찐빵으로 러시아 사람들이 즐겨 먹는 것이다. 많이 팔리는 날에는 하루에 200루블(9,000원)까지 벌 수 있는데, 이 돈으로는 남편의 약값은 물론이고 가족의 생계마저도 유지할 수 없다고 한다.
워낙 공부를 잘하는 클라바는 대학에 들어가는 입학금과 1년 학비를 한국으로부터 지원받았는데 이제 그마저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청운의 꿈을 품었을 것인데,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힘겹고 서글플까.
얼마 전 머릿속까지 얼어버린다는 시베리아 바람에 안나 아주머니는 길거리 장사마저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기어이 풍을 맞고 쓰러져 남편과 함께 누워버린 것이다. 아아, 정말 끝나지 않는 삶의 질곡이여, 그 진절머리 나는 절망의 삶들이여!
그리고 또 얼마 전에는 그녀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다른 고려인들처럼 그 흔한 마우자(러시아인) 병원 한번 가보지 못하고 말이다. 이제 스물두 살 꽃다운 처녀 클라바는 정말로 삶의 고행길 한가운데 서버렸다. 그녀의 어린 동생과 함께.(자원봉사활동가 수필집 중에서)

Ⅹ. 향후과제와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