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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매국노 이완용네의 가계도와 친일행적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8-05-21 00:00:00조회98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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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를 이어 일본에 충성한 대표적 친일파 일가인 이완용 집안은 조부와 부친, 손자 3대에 걸쳐 작위를 세습했다. 이완용 일가 가계도.

 

이완용 : 1905년 을사조약 당시   내각총리 대신으로 을사늑약 체결에 주도적 역할

            '훈1등 백작' 수여.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과 부의장, 조선귀족원 회원 역임

           , 작위도 후작으로 승급(1920년 후작으로 작위 승진

 이항구 : 이완용 아들 - 친일단체 간부

 

 이병길 : 이완용 손자 - 이완용의 후작 작위를 그대로 물려받은 '습작자

             조부에서 손자까지 3대에 걸쳐 일제에 충성


 "이완용의 친인척 중 현직관인이 60명 이상에 이른다"  <대한민보 1909년 7월 27일>

 

이완용의  친인척 중 작위를 받은 사람 :  이윤용(형), 조민희(처남), 민병석, 임선준(사돈), 이항구(아들)

 

 

 

이완용 증손자들은 지금도 조상이 매국질해서 받은 하사금으로 사 놓은 땅에서 떵떵거리면서 잘먹고 잘 살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땅찾기 소송질로 소일하고 있다.

 

 친일 매국노 이완용네의 가계도와 친일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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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 1896년 경북 김천에서 국모보수의 기치를 내걸고 거병. 김산의병진을 조직하여 김천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충북 진천까지 진격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    1907년 11월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의 편성을 주도하고, 군사장으로 그 해 말부터 두 달여 동안 서울 탈환작전을 펴 동대문 밖 10리까지 진격

         1908년 9월 27일, 교수형을 당해 55세를 일기로 순국  - 서대문 형무소 1호 사형수

 

 

허훈 :  3천 마지기 땅을 팔아 군자금으로 기부

허겸 : 허위와 함께 1895년 의병 투쟁에 참가 - 1912년 망명

허형 :  을사오적 가운데 한 놈인  이근택 습격사건에 연루돼 체포

허학 :  의병에 종사

허발, 허규,  허국 =  항일투쟁 혐의로 일제의 요시찰 대상다.

이육사 : 허길의 아들, 저항시인으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음.

허형식 : 21살에 조선인 농민 등을 조직해 일본영사관 습격

           1935년 반일유격대와 국민당 계열의 의용군 등이 연합한 동북인민혁명군 제 2단장 취임

           1939년 북만주지역의 항일연군 3·6·9·11군을 통합한 3로군의 참모장 겸 3군 군장 취임

           1942년 8월 칭청(칭안)현 칭펑링 산골에서 토벌대에 포위되어 사살됨

 

 

 

 

구미시청이 기념관 건립 등 왕산 추모사업 계획을 발표하자, 후손들 일부는 허위선생이 태어난 집터 600여평을 기념사업 부지로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