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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주역사와 수난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7-10-01 00:00:00조회570회
"강제이주,세계사에 유례없는 야만적 범죄"
한민족 특유의 기질로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
※편집자주 = 연해주 일대 17만여명의 고려인은 1937년 9월1일부터 이듬해 3월까지 스탈린의 지시로 하루아침에 집과 고향을 버리고 화물 기차에 강제로 실렸다. 열차를 타기 전 독립운동가나 지식인 등 수천의 고려인은 '일본의 앞잡이'라는 핑계로 총살되거나 사라졌다.
고려인들은 사전에 어디로 간다는 통보없이 화장실은 물론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열차에 빼곡히 실려 길게는 50여일 동안 6천km를 이주했다.
이들이 생사를 넘나들며 도착한 땅은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 지금은 독립이 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지역이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사막지대나 꼴꽁 얼어붙은 눈 속, 먹을 것 한 톨 없는 동토에 땅에 내버려진 고려인들은 땅굴을 파 거센 눈보라와 살을 파고드는 추위를 피했으며, 집을 떠나기 전 조금씩 챙겨온 식량을 나눠 먹으며 생명을 부지했다.
고려인들은 이런 열악한 환경을 한민족 특유의 인내로 감내하며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하는 저력을 보였으며, 오늘날 120개 소수민족 중 가장 뛰어난 민족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소련시절 전체 노력영웅 1천200여명 중 750여명을 배출했다.
연합뉴스는 지난 6월 한민족센터 설립을 기념해 특별취재를 기획, 9월12-24일 취재 및 사진.영상기자 4명으로 취재팀을 구성해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강제이주 현장을 따라가며 취재했다.
30일부터 10월6일까지 7일에 걸쳐 연재하는 이번 취재물은 강제 이주 역사와 수난사, 고려인 재정착과 국적회복, 좌절딛고 성공한 고려인, 고려인 후손 정체성 확립, 고려인과 함께하는 현지진출 한국기업과 시민단체 등으로 구분해 소개한다.
이번 기획 취재에는 대구보건대학, 재외동포재단, 미디어 다음이 도움을 줬다.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왕길환.김병규 기자 =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 가족을 협박했고, 그 길로 기차역까지 끌려가 화물열차에 짐승처럼 실려 어디론 가로 출발했다"
1937년 9월. 당시 12세의 소년이었던 블라디미르 박씨는 70년이 지난 지금 백발의 할아버지가 됐다. 하지만 강제 이주 당시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고 했다.
박 할아버지는 "말과 소를 운반하는 화물열차 1칸에 80명 정도가 탔는데 물도 없고, 화장실도 없었다. 기차가 서면 기차 밑에다 대소변을 보고, 급하면 한쪽에 뚫어놓은 구멍에 대고 볼일을 봤다. 냄새가 지독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자 사람들은 기차가 서면 인가에 뛰어들어가 먹을 것을 구해 먹기도 했고, 결국 먹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도 있었으며 산모는 아이를 낳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바로프스크=연합뉴스) 도광환기자 = 연해주 일대 17만명의 고려인은 1937년 9월1일부터 이듬해 3월까지 스탈린의 지시로 하루아침에 집과 고향을 버리고 화물 기차에 강제로 실려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속에 중앙아시아로 이주됐다. 사진은 수많은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 명령을 통보받고 화장실도 없는 열악한 기차속에 몸을 실은 하바로프스크역의 현재 모습. 지금도 극동 주요지역을 오가는 열차들이 운행되고 있다.
17만여 명의 연해주 고려인은 박 할아버지처럼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짧게는 30일, 길게는 50일 가까이 화물열차에 실려 6천km에 달하는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내버려졌다. 스탈린은 1937년 8월21일 러시아 원동(遠東) 변강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킬 것을 지시했다.
당시 소련군은 강제이주를 반대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지식인 2천800여 명을 체포해 재판 절차도 없이 총살했다.
강제이주를 직접 겪은 카자흐스탄 거주 정상진(90) 전 북한문화부 제1선전성 문화부상은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의 삶은 "비참했다"라고 요약한다. 정 할아버지는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내버려진 고려인들은 집도, 가구도, 농구도, 돈도 없이 땅굴을 파고 추운 겨울을 났다"며 "이주 초기 어린이와 노인 1만여 명이 토질병과 추위에 동사했다"고 회상했다.
영국 BBC 방송으로부터 '아시아의 피카소'라고 불린 신순남(1928-2006년) 화백은 자신이 직접 겪은 강제이주를 '레퀴엠'에 형상화하면서 얼굴을 그려넣지 않았다. 신 화백은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일군 고려인들은 노예였다. 노예에겐 이름도, 민족도 없다. 그래서 얼굴을 그려넣지 않았다"고 설명했었다.
동토의 땅에서 생명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고려인들을 옆에서 지켜봤거나 도움을 줬던 우즈벡인이나 카자흐인들의 증언에서도 그들의 삶은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시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굴리탄시 거주 우즈벡인 후데이 데이디에프 자몬(73)씨는 "너무 어려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중에 어른들로부터 들었다"며 "우즈벡인들이 추위에 떠는 고려인들에게 이불도 가져다 주고, 돈도 주고, 먹을 것도 가져다 줬다"고 말했다.
자몬씨는 "그렇지만 고려인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농사를 잘 지어 정착을 빨리했다"고 전했다.
자몬씨의 증언처럼 고려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한민족 특유의 인내로 감내하며 황무지를 옥토로개간하는 저력을 보였다. 우즈베키스탄의 김병화를 비롯해 황만금, 김만삼 등 750명이 소련시대 최고 훈장인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체 1천200명의 노력영웅 중 60%가 넘는 수치다.
정상진 할아버지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가장 잔혹하고도 비참하며 야만적인 강제이주의 역사를 간직한 고려인들은 공산체제가 저지른 범죄행위를 절대 잊지 말고 살아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현재 고려인 2,3,4세 후손들은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지역(CIS)에서 120개 소수민족 중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