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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저력 카레이스키 .1] 영농신화의...
작성자영남일보작성일2006-07-07 00:00:00조회643회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하늘아래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러시아에서는 '카레이스키'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구한말 한반도에 흉년과 기근이 들면서 당시 황무지였던 연해주에 두만
강을 건너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수확하여 다시 돌아오는 계절농사(
季節農事)를 짓다가 나중에는 아예 국경을 넘어 이주하여 연해주에 정착한
한인들의 수가 약 20만명에 달했다.
초기에는 주로 농업이민(農業移民)이었고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부
터는 항일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우국지사들의 망명이민(亡命移民)이 그
뒤를 따랐다. 연해주를 중심으로 크게 활약했던 항일독립운동은 이미 정착
한 대다수의 농민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제공하였고 식량과 군자금을 대주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업을 실시하였고 무엇보
다 벼농사를 북방 러시아에 전한 공헌을 한 사람들이 바로 카레이스키들이
었다. 당시 한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을 폈던 이유는 한인들이 타고난
근면성, 성실성, 강한 의지력으로 농업과 기타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
휘했기 때문이었다. 극동러시아 전 지역에 한인들이 정착한 곳에서는 틀림
없이 야채와 벼가 공급되어졌다.
한인들에게 가장 비참한 경험인 강제이주는 1937년에 일어난다. 한인의
강제이주에 앞서 한인들의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을 제거했는데 당시 희생
된 한인들이 2천500여명에 달했다. 한인을 실은 열차는 가축 우난차를 개
조, 벽의 널빤지 사이에 틈이 넓으며 화차 중간에 선반을 매어 한 차에 여
러 가구가 탈 수 있게 한 것으로, 사람들을 눕게 하기 위해 짚을 깐 것이
고작이었다. 한 차에 30여명이 탔기에 사람과 사람이 포개서 잠을 자야했
는데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그곳에서 용변을 보아야 하기에 악취가 차안을
진동했으며 극심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야했다. 특히 노약자와 어린이
가 많이 사망하였는데 5명중 1명 꼴이었다 하니 가히 '죽음과의 싸움'이라
고 표현할만 하였다.
중앙아시아에 도착한 한인들은 거처할 집이나 움막도 없는 들판이나 갈
대밭에 내동댕이쳐졌다. 땅을 파고 갈대를 덮은 움막에서 그들은 죽음보다
참혹한 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무엇보다 기후가 다르고 물이 바뀌어 적응
하지 못하고 또 추위와 굶주림으로 견디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강
제이주 다음해엔 7천여명이 사망하였고 그 다음해엔 4천800여명이 사망하
였다 하니 당시의 처참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강제이주 다음해 봄을 맞아 한인들은 결코 굴하지 않고 또 다시
생존을 위하여 몸부림을 쳤는데 특별한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갈대를 꺾고
강에서 운하를 파고 논을 만들어 연해주에서 가져온 벼를 심었다. 이곳 중
앙아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복판에 해당하는 곳이라 햇볕은 좋으나 강우
량이 적어 물이 없어 사막과 같은 곳이다. 강한 햇볕에 물만 충분하면 벼
농사에 둘도 없는 호조건이 된다.
한인들은 그들만의 강한 의지력과 근면성을 발휘하여 논에서 염분을 빼
고 열심히 가꾸어 풍년을 이루고 이듬해에도 계속적으로 벼농사에 성공하
여 벼를 멀리 유럽에까지 보급하였으며 '고려인하면 쌀, 쌀하면 고려인'을
연상하게 하였다. 중앙아시아에 대책도 없이 무조건 버려진 고려인은 벼농
사에 성공하여 재생할 수 있었고 중앙아시아에서 모범적인 소수민족이 된
것이다.
한국학 전문가인 소련 과학 아카데미 산하 경제연구소 부소장인 밀레르
박사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근면함과 그들의 경제적 애국
주의는 가히 놀라운 그들만의 특성이라 볼 수 있다."
벼농사는 연해주에서 경험이 있다지만 처음 보는 목화 재배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 기록적인 수확을 올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인 '허세르게이
' '허동윤' '이봉준' 등 10여명이 목화재배에서 성과를 이루어 근로영웅이
되었다. 고려인들은 어떤 식물을 재배하든 높은 수확을 올렸다.
60년대초 고려인 콜호스(집단농장)에서 전 카자흐스탄의 70%에 해당하는
양파를 생산하였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콜호스가 김병화 콜호스다. 타슈
켄트에서 가장 크게 그리고 훌륭하게 땅을 다스려 옥토를 일궈놓은 분이
김병화 선생이다. 사막지대나 억새가 수북했던 땅을 목화밭으로 만들어 세
계 목화 생산의 20%를 차지할 정도의 주생산지로 만들어 놓았다. 그분은
이주 직후 300만평의 황무지에서 사방으로 물길을 놓아 밀, 목화, 옥수수
를 가꾸고 끝내는 벼농사까지 성공시켜 황금 들녘을 일궈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후방에서 대대적인 식량지원을 한 공로로 증산과 함께 '이중 노력
영웅'의 칭호까지 받았다.
고려인들은 1940-45년 사이 목화와 벼농사를 위한 파종 면적을 10배로
증가시킬 정도로 농업에 있어 탁월함을 나타냈고 40년대 말부터 60년대까
지 210명의 고려인들이 사회주의 근로영웅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인구비로
볼 때 고려인들이 가장 많은 상을 받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고려인들은 농업 외에도 공업, 과학, 문화와 체육 등에서도 탁월한 재능
을 보이며 그들 스스로 삶과 터전을 타향 객지에서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 고려인들은 그야말로 불모지 사막을 옥토로 바꾼 신화를 창조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