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들과의 교류협력 및 지원협력사업에 대한
새소식 내용을 알려드립니다.
고려인 강제이주 70년<1> 50만 고려인의 어제와 오늘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7-01-07 00:00:00조회565회
중앙아시아로 끌려온 한인들의 첫 정착지인 우슈토베 마을 인근의 부슈토베 언덕.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숨진 사람들을 하나둘 묻으면서 무덤이 늘기 시작해 지금은 아예 한인 공동묘지처럼 바뀌었다. 우슈토베=김기현 기자
'글로벌 코리안' 21세기 한국인의 현주소다.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인의 활약상은 눈부시다. 하지만 한국인의 초기 이주역사는 핍박과 절망, 죽음으로 얼룩졌다. 고국에서 6000㎞ 떨어진, 아무 연고도 없는 중앙아시아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우리 핏줄도 그렇다. 스스로를 한국인도 조선인도 아닌 고려인이라 부르는 사람들…. 가난과 기근을 견디다 못해 고향을 버리고 두만강을 건넌 한인들이 러시아 연해주에 첫 발을 디딘 것이 140여 년 전. 이들이 옛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지 올해로 70년을 맞는다. 낯선 땅에서 맨손으로 황무지를 일구고 민족혼을 지키며 유라시아 곳곳에서 살아가는 50만 고려인들의 어제와 오늘을 5회에 걸쳐 살펴본다.
● 묘비들은 말이 없고…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에서 330㎞ 떨어진 우슈토베 마을. 텐산(天山)산맥에서 몰아치는 거센 눈보라와 끝없이 이어지는 갈대밭 사이를 달려 부슈토베 언덕에 도착했다. 회색과 검은색의 지표석이 눈을 뒤집어 쓴 채 나란히 서 있다. 회색 지표석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이곳은 원동(극동)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9일부터 1938년 4월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이다."
이 곳에 도착한 한인들을 맞은 것은 바람과 황무지뿐이었다. 소련 당국은 집과 살림살이, 논밭까지 버리고 온 이들에게 보상도, 지원도 하지 않았다. 땅굴을 파고 갈대로 지붕을 올려서 바람과 눈을 피했다. 짐승이 파놓은 것 같은 구덩이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견디지 못한 아이와 노인들이 죽어 나갔다. 언덕을 가득 메운 헐벗은 무덤들이 당시의 참상을 말없이 보여준다. 칼바람을 이겨낸 이들이 뒤늦게 건축 자재를 얻어 '땅집'이나마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봄.
이제는 마을에도 당시를 기억하는 '강제 이주 1세대'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이 마을 최고령인 김 타티아나(87) 할머니는 "그 얘기 어째 다 하겠소. 죽은 사람들 궁리(생각)하면 잠이 안 오오. 우리 늙은이들 다 죽으면 아(젊은이)들은 다 모르갔지 뭐…"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비극은 그 해 8월21일 스탈린이 한인 이주를 지시하는 비밀명령서에 서명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극동의 소련 영내에 거주하는 한인 17만여 명을 한 명도 남김없이 중앙아시아로 쫓아 보냈다.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면 이들이 일본을 지원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전에 민족 지도자와 지식인, 이주에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인사 2800여명을 체포해 총살했다. 러시아 볼쇼이극장의 유명 메조소프라노 남 류드밀라(59)씨는 "할아버지(남효범)도 어느 날 비밀경찰에 끌려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한인들을 화물차에 싣고 온 기찻길과 처음 내린 우슈토베역. |
어떤 마을은 이주열차에 오르기 하루 전에야 이주 사실을 통보받았다. 짐을 쌀 새도 없이 끌려가는 처지에 내몰렸던 것. 러시아인과 결혼한 한인은 가족과 생이별 해야만 했다.
창문도 없어 문을 닫으면 깜깜한 컨테이너 같은 화물차에 수십여 명씩 실렸다. 어디로 가는 지 영문도 모르고 무작정 달리는 열차에 맨몸을 맡겼다.
기차가 잠시 서는 틈에 기차에서 뛰어내려 물을 기르거나 요기꺼리를 구했다. 겨우 네 살이었던 신 알렉세이(74) 모스크바대 교수는 멈춰 있던 열차가 갑자기 출발하자 '볼일'을 보고 열차 밑에서 나오던 한 여인이 코가 잘려나가는 끔찍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예고 없이 선 기차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며칠씩 서 있기도 했다. 열흘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한 달이나 걸려서 온 것도 그 때문이다. 도중에 죽은 사람은 열차 밖으로 던져졌다. 그러다보니 가족의 유해도 찾을 수 없는 형편이 됐다.
● 그래도 다시 일어나
낯선 땅에서 긴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은 한인들은 이듬해 봄부터 황무지를 논밭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농기구도 제대로 없어 맨손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물길을 내고 농토를 만들었다.
하지만 농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중앙아시아로 끌려온 뒤 마음대로 이동할 자유도 없었고 한인 학교는 폐쇄됐다. 한인들은 2차대전이 일어나도 군 입대조차 하지 못했다. 박 릴리야 노보로시스크 고려인협회장은 "우리는 지은 죄가 없는 죄수였고 허락된 지역 이외의 경계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무거운 죄를 덮어쓰고 살았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스탈린이 죽고 나서야 이런 탄압이 풀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곳곳에 카레이스키 콜호즈(한인 집단농장)가 들어섰다. 대표적인 것이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 근교의 황만금(1921~1997) 농장. 소련 해체 후 농지 사유화로 이제는 아들 황 스타니슬랍(64) 씨의 개인농장으로 규모가 줄어들긴 했지만 1960년대까지 3900만 평 규모에 1만3000여명의 농업노동자들이 일하는 소련 최대의 농장이었다. 농장 안에 자체 실험실과 학교, 병원까지 있을 정도였다. 베트남 지도자 호치민 등 국빈들이 소련을 방문할 때마다 단골로 들리는 곳이 됐고 북한에서도 해마다 견학단이 왔다.
이주 초창기 고려인 마을 모습. |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으나 한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유난히 높은 교육열을 가진 한인들은 악착같이 자녀들을 공부시켰다. 타슈켄트에 사는 김 나탈리야(78) 할머니는 "신과 옷이 없어도 학교는 다들 보냈지"라고 회상했다. 고등교육을 받은 이주 2세대는 농업뿐 아니라 교사와 엔지니어 등 전문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자식에게 더 나은 환경과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짐을 꾸렸다. 신 블라디미르(52)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문화협회장은 "우리 남매는 태어난 곳이 다 다르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부모가 카프카스의 체첸으로 다시 이주했기 때문이다. 신 회장은 체첸에서, 형은 카자흐스탄에서, 여동생은 북(北)오세티아에서 태어났다. 신 회장은 성인이 된 뒤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왔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고려인 사회는 다시 꿈틀거렸다. 러시아 등 상대적으로 더 발전된 곳으로 이동했다. 외국행이 자유로워지면서 젊은층은 한국이나 미국 캐나다 호주 유럽으로 유학이나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소련 시절 집단농장 모습. |
고려인들은 소련에서 '농사 잘 짓는 민족'으로 유명했지만 정착하기보다는 유목민처럼 유라시아 대륙을 누벼왔다. 고려인 출신으로 북한 정권에서 문화선전성 부상(차관)을 지냈던 정상진(88) 옹은 비극적인 과거사인 강제 이주에도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반도와 극동 연해주에 갇혀있던 한인들이 비록 타의에 의해서지만 집단적으로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중앙아시아로 가면서 비로소 '더 큰 세계'를 보았다는 것.
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초대 회장을 지낸 한 구리(75) 박사도 "단일 민족으로 같은 문화에서만 살던 한인들이 처음으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의 문화와 만나고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이질적인 민족들과 어울려 사는 법을 배웠다"고 평가했다. 고려인들의 인내와 끈기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적응력은 70년 동안의 온갖 시련을 통해 길러진 것이다. 한 박사는 말했다. "우리 고려 사람이야 어디 가서도 살 수 있지. 그렇지 않소?"
알마티·타슈켄트=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 “아리랑, 그때 그 감격이란” ▼
"어렴풋이 알고 있기만 했던 아리랑을 난생 처음 목청껏 따라 불러 봤지…."
옛 소련과 수교조차 체결돼지 않았던 1990년 9월3일 모스크바 중심가 국립 소브리멘니크(현대)극장. 한국에서 8000㎞ 떨어진 이국의 밤하늘에 아리랑 합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아일보사가 재소 한인 동포를 위해 올린 창극 아리랑 순회공연 첫 무대였다.
한국에서 온 대규모 공연단은 이때 처음으로 철의 장막 너머 소련 땅을 밟았다. 공연단은 모스크바와 타슈켄트, 알마티 등 6개 도시를 돌았다. 가는 곳마다 소문을 듣고 현지 한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딱히 공연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수십여 년 동안 잊고 살았던, 아니 꿈에도 그리던 조국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창극의 주인공은 1915년 러시아로 이주했던 어느 가족. 알마티에 사는 정상진(88) 옹은 "대부분 우리말이 서툴러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가만 보니 바로 우리 이야기였지"라고 회상했다. 무대와 객석이 따로 없었다. 함께 울고 웃으며 머나먼 땅에 버려진 자신들을 잊은 조국에 대한 원망도, 이제야 동포를 찾아왔다는 미안한 마음도 아리랑 노래에 실려 보냈다.
많은 고려인들은 16년 전 아리랑 공연 당시의 벅찬 감격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 민족임을 확인한 최초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소련 시절 강제 이주의 비극은 오랫동안 함부로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금기'였다. 대를 이어가며 고단한 삶을 살아왔던 이들에게 그 날의 공연은 이산의 한을 푸는 한 마당이었다.
당시 러시아 고려인연합회장을 맡았던 신 알렉세이 모스크바대 교수(76·역사학)는 "이 공연을 계기로 그동안 흩어진 채 숨어서 살던 고려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모이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알마티·타슈켄트=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