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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한 거름삼아 뿌리내린 ‘원조한류’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6-07-09 00:00:00조회553회

〈18〉 한국문화의 전도사 고려인들 / 망국의 한 거름삼아 뿌리내린 ‘원조한류’

지금 중앙아시아에는 정처없는 유랑 길을 헤매다 정착한 한인들이 36만명 가량 살고 있다. 자신을 ‘고려인’(러시아어로 ‘까레이스끼’)이라고 부르는 그들이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까지의 피눈물 나는 역정은 나라 잃은 민족의 비사다.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지던 1863년 가난한 농민들 13가구가 살 길을 찾아 눈보라 휘몰아치는 우수리강 유역에 괴나리봇짐을 풀어놓은 것이 첫 러시아 이주다. 그 후 일제의 조선 강점과 3·1운동을 계기로 농민들과 독립지사들이 러시아 극동지역에 대거 모여들어 1920년대 말에는 25만에 달했다. 그러다 1937년 한겨울에 극동의 한인 18만여명이 한달간 수송열차에 실려 낯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송된다. 한인들은 주로 타슈켄트와 카자흐스탄 우스토버 부근의 사막에 내려졌다. 그들은 움막을 쳐놓고 삽과 곡괭이로 황무지를 개간해 벼농사 짓고 목화를 가꾸며 연명해야 했다. 오늘날 고려인들은 바로 그 망국유민들의 2, 3세들이다.

바자르마다 ‘까레이스끼 샐러드’
고려인이 가장 많은 곳은 우즈베키스탄이다. 그 중에서도 타슈켄트 등 대도시에 몰려 있다. 대도시에서 고려인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은 바자르(재래시장)다. 어느 대도시나 바자르 몇 개씩은 있는데, 어김없이 장사하는 고려 여인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도 타슈켄트 도착 다음날 옛 시가지 서북쪽 쿠칼다슈 대사원을 구경하고 나서 곧장 그 뒤에 붙은 초르시 바자르를 찾았다. 중앙아시아 2대 바자르의 하나라고 한다. 들머리부터 발디딜 틈이 없다. 샤슬릭(꼬치구이)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좁은 계단을 비집고 올라가니 체육관을 방불케 하는 돔 모양의 2층 대형 건물이 나타난다. 중앙상가다. 내부는 지름 70~80m는 실히 되는 원형공간인데, 갖가지 토산품부터 일용품까지 없는 게 없다.

우리 관심거리는 단연 고려인들의 매대였다. 한변 길이가 15m쯤 되는 ㄱ자형 매대 위에 울긋불긋한 한식 먹거리가 가득 놓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게 김치다. 큼직한 배추 폭에 빨간고춧물이 제법 짙게 배어 먹음직스럽다. 무짠지며 오이절임, 나물무침, 심지어 생선 자반까지 푸짐하다. 여인 들에게 인사를 건네자 반갑게 맞인사를 한다. 더러는 우리말을 모르는 듯, 어안이 벙벙해 하면서도 눈웃음만은 잃지 않았다. ‘까레이스끼 샐러드’로 불리는 김치는 여기서도 인기 식품이라고 한다. 이렇게 고려인들에 의해 우리 음식문화가 알려져 토착화되어 가고 있다. (시장에서는 주먹만한 토마토 한 개가 40숨(1숨은 한화 1원 정도), 큰 수박 한 개가 600숨, 쟁반만한 빵 한 개가 200숨이니, 값은 싼 편이다.)
며칠 뒤 우즈베키스탄의 다른 도시 부하라에 있는 콜호스 바자르에 들렀다. 거기 광경도 타슈켄트의 바자르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고려 여인들의 매장에서 림니나라는 50대 중반의 아주머니를 만났다. 의사소통에는 별문제가 없을 정도로 우리말을 곧잘 한다. 고향이 어딘가고 묻자 “신동주(신의주?)라고 합데(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거기서 태어나 어릴 적 한글을 배워 “쪼꼼(조금) 아오”라고 한다. “잉간(대단히) 반갑소”라고 거듭 말한다. 말투나 억양은 틀림없는 함경도 사투리다. 필자 역시 고향 부근이 함경도라 맞장구칠 수 있었다. 일에 지쳐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눈빛만은 그렇게 영롱할 수 없다. 무엇이라도 듬뿍 사주고 싶었다. 인파 속에 묻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는 손을 저어 우리를 바래주었다. 그의 손때 묻은 김치 매대를 배경으로 함께 찍은 사진은 그날 만남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새겨 주곤 한다.

‘벼수확왕’ 김병화·‘낙동강’의 조명희
고려인들이 이역땅에서 삶을 일군 역정은 또한 억척 같은 의지와 근면으로 겨레의 얼과 혼을 빛낸 민족사다. 1897년 영국 지리학자 비숍이 쓴 저서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비숍은 조선의 가난과 상류계층의 방탕을 보고 조선의 장래에 절망을 느끼다가 러시아 한인촌을 방문한다. 여기서 그는 한인들의 근면성과 잘 사는 모습을 보고 나서 자신의 오판을 후회했다. 그는 조선사람은 ‘밖에 나가면 더 잘 사는 민족’이란 체험적 결론을 내린다. 그 ‘한인촌’이 바로 고려인들이 개척한 마을이다. 비숍은 거기서 그들의 남다른 근면에 감복한다.

지금도 중앙아시아 지역을 다니다 보면, 가끔 가슴에 큼직한 훈장을 단 사람의 초상화가 길가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에겐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50~60년대 모스크바를 지날 때면 빠지지 않고 들렀던 곳이 바로 농·공업 성과를 알리는 공업농업전시관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농업전시관 입구 양쪽에 걸렸던 노력영웅들의 대형 초상화다. 그들 중에는 주로 벼농사에서 출중한 위훈을 세운 중앙아시아 고려인 출신들이 여럿 끼어 있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45년부터 옛 소련이 해체된 91년까지 소련 내 14개 민족이 운영하는 콜호스(집단농장)에서 650명의 노력영웅이 나왔는데, 총인구의 1%밖에 안 되는 고려인들이 139명이나 차지했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 전설적인 이중영웅 김병화가 있다. 연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37년 타슈켄트 부근의 사막에 와서 삶의 둥지를 틀었다. 40년부터 35년간 ‘북극성 콜호스’(사후 ‘김병화 콜호스’로 개명)란 집단농장을 이끌며 다수확 벼농사로 이름을 날렸다. 이 농장은 지금도 여전히 고려인 700명을 포함해 구성원이 3000여명이나 되는 큰 농장이다. 구내 ‘김병화 박물관’에는 농장개척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각종 농기구들과 생활상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사무실 정면 벽에는 ‘조국을 차잤(찾았)다’라는 내리 걸개 구호가 걸려 있어 절절한 조국애를 절감케 한다. 이러한 조국애가 있었기에 고려인들은 한랭과 건조의 악조건을 극복하며 벼 문화를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전시켜 명실상부한 우리 문화의 전도사 구실을 했다.

타슈켄트에는 타향만리에서도 고국을 잊지 않는 영혼들이 잠들어 있다. 문학을 꿈꾸던 소년 시절 필자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주었던 소설 중 하나가 조명희의 〈낙동강〉(1927)이다. 선생을 타슈켄트에서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우즈베크 민족문학의 아버지 알리세르 나보이의 이름을 딴 ‘나보이 문학박물관’ 4층에 ‘조명희기념실’이 있었다.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반일활동에 매진하던 선생은 1928년 소련에 망명해 작품활동을 계속하다 무고한 죄목을 쓰고 1938년 처형된다. 그러나 사필귀정이라, 지금은 명예가 회복되어 생애가 재조명되고 있다. 기념실 중앙에 모신 선생의 흉상 위에 “그러나 필경에는 그도 멀지 않아서 잊지 못할 이땅으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라는 〈낙동강〉의 한 구절이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이것이 선생을 비롯한 고려인들이 지닌 수구지심(首丘之心)과 낙엽귀근(葉歸根)의 끈끈한 근성이요 정체성인 것이다.

‘집 떠난 사람 더 생각하라’ 했거늘
선대들의 이런 근성과 정체성을 이어받은 후대들은 오늘날 곳곳에서 ‘고려인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고려인 3세인 우즈베크 역사연구소 부소장 발레리 한 박사는 ‘한국철학사’ 집필을 통해 우리 철학을 소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곳 고려인들은 민족적 자긍심을 안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고려신문’을 발간하고, 우즈베크 고려인 문화협회, 과학자협회, 경제인협회, 가무단협회 같은 분야별 조직을 두어 활동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야말로 우리 역사의 외연을 담당해 온 한 주역이라는 사실이다. 고사성어에 ‘귀곡천계(貴鵠賤鷄)’란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 ‘고니를 귀하게 여기고 닭을 천하게 여긴다’란 뜻이다. 하지만 삶 속에 녹아난 성어로는 ‘먼 데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운 데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라는 말로서, ‘집 떠난 사람을 더 생각하라’는 훈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고니’처럼 멀리 집 떠난 그들에게 이 성어가 가르치는 ‘인지상정’을 베풀어 왔는가 ? 답사 내내 가슴을 짓누른 반문이었다. 더욱이 선친대부터 그러한 ‘고니’ 신세에 서러움과 한을 품어온 필자로서는 동병상련의 연민이랄까, 남다른 감회에 젖어 있었다.

지금 우리는 그들을 그럴싸하게 ‘한인’이라고 부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일본, 미국의 한인들은 ‘재일교포’니 ‘재미교포’니 하면서 한겨레임을 과시하나, 중앙아시아, 중국의 한인들에게는 온정 베풀기에 인색하니 말이다. 그들이 한결같이 고국에 가고 싶어하면서도, “언제 가겠소!”라고만 하는 말이 마냥 한 맺힌 하소연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