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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의병장 고려인 후손 불법체류 10년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6-07-09 00:00:00조회756회
불법체류 10년…부모 임종못해
[서울신문]고국에 온 뒤에도 왕산가(家) 후손인 허게오르기씨와 허금숙씨는 서로 연락을 못하다 지난 달에야 처음 만났다. 허금숙씨는 “그 분들은 한국말을 잘 못하셔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라고 걱정했다. 허게오르기씨는 “10년이 넘게 귀화를 하지 못하고 고생했다고 들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들은 서로의 안부를 걱정했지만, 정작 자신들의 일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체념하는 태도를 보였다. 고국이 부당하게 대우해도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핏줄끼리는 통하는 게 있어 보였다. 오히려 한국 국적을 갖게 된 후손들은 이산가족이 됐던 가족들과 다시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할아버지 서훈 받아도 불법체류자로 입국…부모 임종도 못지켜
해외에 흩어져 살던 왕산가 후손 가운데 가장 먼저 조국에 돌아온 사람이 성산 허겸의 손녀인 허금숙씨다. 입국과 체류 경위를 따지자면 사실 ‘조국에 돌아왔다.’는 말이 무색하다.1995년에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온 허씨는 곧 불법체류자가 됐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된 아들과 딸의 학비를 벌기 위해 입국한 첫해 가정부로 일하던 허금숙씨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 신도시 개발 때 아파트 공사현장 식당에서 잠시 일하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아파트 단지내 페인트칠 작업을 하게 됐다. 현장의 우악스러운 분위기와 남자들의 지분거림에서는 해방됐지만, 여성이 하기에는 고된 일이었다.
교사의 아내로 중국에서 지낼 때와는 달리 힘든 생활을 하다 허금숙씨는 골다공증을 얻었다. 불법체류자 신분이라 건강보험 적용도 받지 못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자원봉사 단체에서 치료를 받았다.10년 동안 법적·정신적으로 허금숙씨는 외국인이었다.
부모와 형제들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무너진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허금숙씨까지 6남매 중에 오빠, 바로 밑 남동생이 허금숙씨가 우리나라에 온 다음에 숨을 거뒀지만, 한번 나가면 국내로 돌아올 수 없으니 갈 수가 없었다. 남편과 자식도 국내로 들어오지 못했다.3살 터울로 사이좋은 두 남매가 결혼할 때에도 사진과 전화로 소식을 듣는데 만족해야 했다. 허금숙씨는 “이제 국적을 받았으니 주민등록증도 만들고, 여권도 만들어서 남편을 보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불법체류자라도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는 기사를 보고, 귀화 신청을 한 게 2년 전이니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할아버지 성산의 시신을 대전 국립묘지로 옮긴 게 1992년인데도 확인할 게 남았다며, 행정처리 기간이 늘어졌다. 허금숙씨는 “나만 귀화신청을 하는 것도 아니니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국 왔으니 좋은 일만 생길 것”
다행히 왕산 허위의 막내 허국의 아들인 허게오르기씨와 허블라디슬라브씨는 각각 입국한 지 6개월과 1년 만에 국적을 받았다.
이들은 우리나라 국적을 갖게 됐으니 이름도 바꾸겠다고 한다. 게오르기씨는 ‘길(吉)’로, 블라디슬라브씨는 ‘석(石)’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허게오르기씨는 우리나라에 왔으니 이제 ‘좋은 일’만 생기라는 의미에서 ‘길’자를 택했고, 허블라디슬라브씨는 지질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이름을 ‘돌’로 지었다.
미국·중국·구소련 지방 등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왕산가 후손들은 대부분 대학교육을 받았다. 유독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많은 것도 특이하다. 허게오르기씨도 자동역할을 공부했다. 언젠가 고국에 돌아간다면 문학이나 어학을 공부하는 것보다 공학을 배우는 게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고 이들은 설명했다.
하지만 고국에 돌아와도 이들은 단순한 노동밖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따져보면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1991년부터 구소련 지역의 자국민 우선정책에 따라 연구소에서 쫓겨나 트럭운전사·소작농을 하던 때와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허게오르기씨는 “한국말이 서툴고, 한국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라면서 “문제는 우리에게 있지, 하나도 잘못된 게 없다.”고 말했다. 최근 이들의 사연을 들은 경기도 안성의 의료기 제조업체 ㈜비겐에서 일자리를 마련해줬다.
●“그동안 나라 발전하느라 독립운동가 못챙겼을 것…”
허블라디슬라브씨의 아들 허알렉산드라(27)씨는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는 이유로 고려대학교 한국문화센터에 장학금을 받고 다니게 됐다. 한국말은 못하지만 며칠 만에 젓가락질을 배운 아들이 대견한지 허블라디슬라브씨는 “먹고 사는 일이니 금방 배우더군요. 말도 곧 배울 겁니다.”라며 웃었다.
그는 이어 “그 동안 독립운동한 사람을 못찾은 것도 나라가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것뿐”이라면서 “뿔뿔이 흩어졌던 왕산가 후손들도 모두 모이고 점차 나아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할아버지 서훈 받아도 불법체류자로 입국…부모 임종도 못지켜
해외에 흩어져 살던 왕산가 후손 가운데 가장 먼저 조국에 돌아온 사람이 성산 허겸의 손녀인 허금숙씨다. 입국과 체류 경위를 따지자면 사실 ‘조국에 돌아왔다.’는 말이 무색하다.1995년에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온 허씨는 곧 불법체류자가 됐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된 아들과 딸의 학비를 벌기 위해 입국한 첫해 가정부로 일하던 허금숙씨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 신도시 개발 때 아파트 공사현장 식당에서 잠시 일하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아파트 단지내 페인트칠 작업을 하게 됐다. 현장의 우악스러운 분위기와 남자들의 지분거림에서는 해방됐지만, 여성이 하기에는 고된 일이었다.
교사의 아내로 중국에서 지낼 때와는 달리 힘든 생활을 하다 허금숙씨는 골다공증을 얻었다. 불법체류자 신분이라 건강보험 적용도 받지 못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자원봉사 단체에서 치료를 받았다.10년 동안 법적·정신적으로 허금숙씨는 외국인이었다.
부모와 형제들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무너진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허금숙씨까지 6남매 중에 오빠, 바로 밑 남동생이 허금숙씨가 우리나라에 온 다음에 숨을 거뒀지만, 한번 나가면 국내로 돌아올 수 없으니 갈 수가 없었다. 남편과 자식도 국내로 들어오지 못했다.3살 터울로 사이좋은 두 남매가 결혼할 때에도 사진과 전화로 소식을 듣는데 만족해야 했다. 허금숙씨는 “이제 국적을 받았으니 주민등록증도 만들고, 여권도 만들어서 남편을 보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불법체류자라도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는 기사를 보고, 귀화 신청을 한 게 2년 전이니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할아버지 성산의 시신을 대전 국립묘지로 옮긴 게 1992년인데도 확인할 게 남았다며, 행정처리 기간이 늘어졌다. 허금숙씨는 “나만 귀화신청을 하는 것도 아니니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국 왔으니 좋은 일만 생길 것”
다행히 왕산 허위의 막내 허국의 아들인 허게오르기씨와 허블라디슬라브씨는 각각 입국한 지 6개월과 1년 만에 국적을 받았다.
이들은 우리나라 국적을 갖게 됐으니 이름도 바꾸겠다고 한다. 게오르기씨는 ‘길(吉)’로, 블라디슬라브씨는 ‘석(石)’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허게오르기씨는 우리나라에 왔으니 이제 ‘좋은 일’만 생기라는 의미에서 ‘길’자를 택했고, 허블라디슬라브씨는 지질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이름을 ‘돌’로 지었다.
미국·중국·구소련 지방 등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왕산가 후손들은 대부분 대학교육을 받았다. 유독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많은 것도 특이하다. 허게오르기씨도 자동역할을 공부했다. 언젠가 고국에 돌아간다면 문학이나 어학을 공부하는 것보다 공학을 배우는 게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고 이들은 설명했다.
하지만 고국에 돌아와도 이들은 단순한 노동밖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따져보면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1991년부터 구소련 지역의 자국민 우선정책에 따라 연구소에서 쫓겨나 트럭운전사·소작농을 하던 때와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허게오르기씨는 “한국말이 서툴고, 한국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라면서 “문제는 우리에게 있지, 하나도 잘못된 게 없다.”고 말했다. 최근 이들의 사연을 들은 경기도 안성의 의료기 제조업체 ㈜비겐에서 일자리를 마련해줬다.
●“그동안 나라 발전하느라 독립운동가 못챙겼을 것…”
허블라디슬라브씨의 아들 허알렉산드라(27)씨는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는 이유로 고려대학교 한국문화센터에 장학금을 받고 다니게 됐다. 한국말은 못하지만 며칠 만에 젓가락질을 배운 아들이 대견한지 허블라디슬라브씨는 “먹고 사는 일이니 금방 배우더군요. 말도 곧 배울 겁니다.”라며 웃었다.
그는 이어 “그 동안 독립운동한 사람을 못찾은 것도 나라가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것뿐”이라면서 “뿔뿔이 흩어졌던 왕산가 후손들도 모두 모이고 점차 나아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2006년 8월 14일 (월) 08:41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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