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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1세대에게 한끼 사랑 나누기(1)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9-07-09 00:00:00조회645회
55년만에 또 다시 갈기갈기 찢어져야 하는 이산(離散)의 고통에 오열하는 고려인 1세대의 아픔을 아십니까?
타쉬켄트시에서 20키로 떨어진 곳에 고려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들이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도 이제는 귀에 익숙한 뽈리따제르, 프라우다, 김병화 마을 등이 바로 고려인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처음에 이들이 이곳에 던져졌을 때는 갈대만 무성하고 이리떼가 몰려다니던 곳이었지만 고려인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서 사람 키보다 더 크고 무성한 갈대를 손으로 하나 하나 뽑아내 벼를 심고 논밭을 일궈 옥토로 만들었다.
젊었을 때 프라워다 회장 밑에서 불가질(회계수)를 보셔서 아주 똑똑하셨단다. |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그저 고려인들의 일하는 모습에 놀랄 뿐이었다. 한 해가 저물고 또 다른 해가 찾아올 때마다 고려인들의 근면함과 끈기, 한민족의 민족적 우수성은 다른 민족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이 때까지 집다운 집에 살지 못하고 흙을 빚어 만든 움집에 살던 우즈벡 민족들에게 벽돌로 집을 지어 주고 농사 짓는 방법을 알려 주어 사람답게 살게 해 주었다는 고려인에 대한 감회가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마음에 오랜 세월이 흘러갔어도 따뜻한 기억으로 자리잡았다.
이렇게 고생한 이들의 수고는 훈장과 표창으로 구소련에서 한민족의 위상을 드높였고 국가의 요직에 진출할 정도여서 이제는 고생한 보람을 찾은 듯하였으나 구소련 붕괴라는 더 혹독한 시련이 이들에게 찾아온 것이다.
이 곳에 옮겨진 지 65년이 지난 지금 고려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에는 또 다시 갈기갈기 찢어진 가정과 죽음만 기다리는 병든 노인들의 탄식 소리만 쓸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제 남아 있는 고려인 이주 1세들은 이곳에 올 때 어린 나이였다. 스무살 때 이곳에 이주해 온 할머니, 열차에서 어린 동생들의 죽음 앞에 통곡하던 십대 아이들이 지금 칠 팔십의 고령의 나이가 되어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쓰라린 기억을 떨리는 입술로 되뇌이고 있다.
"왜 우리는 고려인으로 태어났을까?
왜 고려인으로 태어나 이런 설움과 눈물과 한많은 세월을 보내야 되었나?
왜 우리는 남의 땅만 일구고 남의 집만 지어주고 남의 나라 위해 죽도록 고생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삶을 마감해야 되는가?
우리는 지하 감옥같은 어둠 속에서 조국도 모르며 살아왔다. 부모, 형제 내 핏줄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왔다. 왜 거친 운명의 광풍은 우리 고려인들을 이렇게도 밀어부칠까? 이제는 험악한 나그네 인생길에서 벗어나 눈물과 고통이 없는 편안한 쉼이 그립기만 하구나."
어린 시절, 엄마 아빠의 옷자락을 놓칠 새라 움켜쥐고 강제로 태워진 열차 안에서의 생생한 기억들이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다. 죽기 전에는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고통스런 기억들이 밀물처럼 쉴새없이 밀려온다.
1937년 러-일 전쟁으로 말미암아 강제로 이주된 고려인들. 짐짝처럼 때려 실은 고려인들을 태운 열차는 길고 큰 기적을 울리며 어디론지 떠난다.
하루길 즘 되려나? 사흘 길 즘 되려나? 길면 일주일쯤 되겠지.
아무도 모른다.
프라워다 1에 사시는 김규오르기 75세 된 할아버지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시는 할아버지를 1차,2차,3차, 방문할 때마다 일으켜 드려야 했다. 평생 일하다가 병들고 먹을 것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데.. 죽기 전에 쌀 밥이라도 드셨으면 하신단다...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말씀하시면서 정말 우리가 뵙기에도 금방 돌아가실 것 같은 할아버지가 쌀을 보시더니... 고맙소,,고맙소,, 몸을 움직이셨다. |
어디로 가는 것인지.
왜 가는 것인지.
며칠을 가야 되는지.
단지 고려인이기 때문에 이 열차에 태워졌을 뿐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죽음의 열차 행, 노약자들은 밟혀서 죽고 눌려서 죽고 추위와 배고픔과도 싸워야 되고 또 그 고통에도 생명들은 탄생되고 40여일이 지났나 보다.
낯선 어느 땅에 짐승처럼 버려졌다. 이곳이 어디냐? 자 이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현지에 정착 후 무서운 질병으로 10대 미만들은 대책 없이 죽어만 간다.
아무도 모른다. 고려인들의 슬픔과 피눈물을...
하지만 울고만 있을 수 없다. 산 사람들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꼭 살아서 이 한을 풀어야 한다.
우리 고려인들이 조상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고생과 눈물이요, 둘째는 부지런함과 근면, 성실함이다.
아름답고 소중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눈물로 빵을 먹으며 맨손으로 시작했지만 금방 눈에 띄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지인들 보다 앞선 개척자의 정신으로 버려진 땅들을 옥토로 만들기 시작하고 모든 면에서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특별히 고려인들은 비록 자기는 고생하지만 자식들은 훌륭히 키워야 된다는 교육은 큰 열심과 감동적이었다. 덕분에 안정된 좋은 직장에서 무리 없이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그러던 1991년 공산당이 붕괴되고 소련이 16개국 공화국으로 독립이 되면서부터 고려인들의 눈물의 역사는 또 다시 시작이 되었다.
법이 바뀌고 언어가 바뀌고 갑자기 직장도 잃고 교육도 시킬 수가 없다.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바뀐다,
떠나자! 떠나자! 모두가 술렁인다.
백 여 개 민족이 모여 살던 이곳 중앙아시아. 다른 민족들은 자기 국가에서 데려간다. 이스라엘 민족, 독일 민족, 어디 어디 민족은 나라에서 경비를 대주고 문을 활짝 열어 모셔간다는데 우리는 어디로 가나? 내 조국은 어디 있나?
또 다시 이들의 눈물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55년 전에는 타의에 의해서 끌려왔지만 이제는 가슴 찢는 고통으로 스스로 부모와 집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거리를 찾아서 아이들 교육 때문에 집을 버리고 부모를 남겨둔 채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러시아 땅.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곳도 없이 정처 없이 떠나는 것.
큰 아들은 모스크바로 작은 아들은 우크라이나로 큰 딸은 카작스탄으로 작은 딸은 연해주로 온 가족은 차비가 없어 돌아올 수 없는 각박한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남편도 교직자로 평생을 받쳐서 일했고, 부인도 평생을 고려인 학교에서 일했다. 고려인이 살아남으려면 배워야 산다고... 그러나 일생을 몸바쳐 일했지만 지금은 중풍에다 먹을 것도 없이 적은 삔실(연금-한달에 9천원)로 살고 있다. 돈이 없으니 아무리 아파도 병원은 고사하고 하루 먹고 살기도 힘이 든 실정이다. 그나마 하나있는 아들은 집에 먹을 것이 없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다 못해 도둑질로 감옥 6년형을 받고.... 쌀과 적은 성금을 보고 우시는 ,,,프라워다 3에 사시는 김엘리나 할머니. |
죽음을 무릎 쓰고 뼈를 깎는 인고의 세월을 참고 참아온 보상이 이런 것인가? 손자 손녀 오손 도손 모여 사는 따뜻한 가정이 아니라 오늘도 소식 없는 자식들 기다리면서 손자 손녀들의 굶주림을 지켜보아야하는 것이란 말인가? "커가는 아이들이라 한 끼라도 쌀밥을 먹여야 할 텐데...." 눈물 섞인 탄식만 갈라진 입술을 타고 가느다랗게 흘러나온다. 며느리는 병든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우즈벡 사람에게 먹고 살 길을 찾아 떠나버렸다. 시집간 딸은 쫓겨나서 방구석에서 울고만 있다. 이제는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할 말이야 가슴 속에 묻어두고 어서 빨리 눈을 감는 게 유일한 소원일 뿐이다. 고려인들의 길고 긴 설움과 눈물의 여정은 언제나 끝이 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