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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0돌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열전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6-07-06 00:00:00조회544회
한인 빨치산부대 만들어 “독립 유격전”
[한겨레]2005-09-06 02판 13면 1995자
파르티잔스크. ‘빨치산의 도시’란 뜻으로,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은 시호테알린산맥이 마지막 요동을 치는 곳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인 파르티잔스크의 풍광은 처음 찾은 한국인한테도 낯설지 않다. 떡갈나무로 덮인 해발 1천m 안팎의 산들은 강원도를, 거기에서 내려온 물길이 적시는 들판은 경기도를 떠올리게 한다. 19세기 중반 이후 기근과 폭정, 농민반란 끝에 러시아로 건너간 10만~20만명의 조선 농민들이 ‘기회의 땅’으로 삼은 곳 가운데 하나가 당시 수청(水淸)으로 불린 이곳이다. 신영동, 동개터, 다우지미, 큰령 등 한인 정착촌이 발달한 파르티잔스크는 대한제국 패망과 러시아혁명을 거치며 연해주 한인 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른 곳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조국을 빼앗긴 분노, 홍범도와 김경천 등 독립군 지도자들의 활동, 땅 없는 농민들의 처지 등이 이곳에 빨치산 운동의 불을 지폈다. 이 복판에 한창걸(1892~?)이 있다.
한창걸은 한-러 국경 근처인 연해주 하산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5년 러시아군에 징집돼 독일 전선에 참전한 그는 군사학교를 거쳐 장교로 임관했다. 1918, 2월 제대해 신영동(현 니콜라예프카마을)에서 한인 최초의 농민소비에트를 만들었다. 그러나 극동에서의 혁명은 백군(반혁명군) 및 외국간섭군의 반격에 부닥쳤다. 특히 일본은 1918, 4월 이후 병력 7만여명을 극동과 북만주 일대에 깔아놓고 연해주 침탈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인 80여명으로 빨치산부대를 만든 한창걸은 러시아인들과 함께 백군과 일본군, 미군과의 싸움에서 전과를 냈다. 산이 많은 파르티잔스크는 유격전에 알맞았다. 하지만 한창걸부대는 1919년 4월 일본군과 백군이 진격해 오면서 희생자를 내고 퇴각했다. 그 해 11월 무기 지원 약속을 받고 백군 내부의 반란에 참가한 한창걸은 체포돼 일본군한테 넘겨져 고문에 시달렸다. 다음해 1월 빨치산부대의 블라디보스토크 진격으로 구출된 그는 파르티잔스크로 돌아와 부대를 재건하고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1920년 4월 일본군은 연해주 각지를 기습해 최재형 등 한인 지도자들을 포함해 한인과 러시아인 5천명을 살해하는 ‘4월 참변’을 일으켰다. 사상자를 내고 물러난 한창걸부대는 연해주를 떠돌며 싸움을 계속했는데, 한창걸은 1921년 1월 만주에서 연해주로 이동한 독립군이 주축이 된 임시군사위원회 군정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강국모가 이끄는 혈성단과 연합한 한창걸부대는 그 해 8월께 일본군 장교 출신인 김경천을 사령관으로 추대해 800명 규모의 부대와 사관학교를 만들었다. 김경천은 부대원들에게 “이국 땅에서 우리의 철천지 원수 일본군을 공격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하자”고 연설했다. 김경천과 한창걸은 파르티잔스크에서 일본군의 후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을 퇴치하며 농민들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이후 한창걸부대는 1922년 ‘올가만 해방 전투’ 등에서 연승하고, 일본군이 완전 철수해 그 해 10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활약을 펼쳤다. 한창걸은 내전이 끝날 무렵 한인 빨치산 연합조직인 고려혁명군정청 위원에 선임됐다.
한창걸부대는 해산 뒤 ‘붉은 별’이라는 협동농장을 만들었고, 그는 1930년대에 하바로프스크 근처의 비로비잔 유대인 자치주 내무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1930년 후반 스탈린 체제에서 숙청당했는데, 그 최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파르티잔스크의 니콜라예프카마을은 한인사회당 중심인물이자 코민테른 집행위원을 지낸 박진순의 고향이기도 하다. 스탈린 체제 이전까지 한인들이 논농사를 짓던 니콜라예프카는 이제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온 동포 10여가구가 섞여 사는 전형적인 러시아 농촌마을이 됐다. 파르티잔스크는 1970년대에 중국식 이름을 버리고 혁명에 몸바친 빨치산들을 기리는 이름을 얻었다. 현지 고려인협회 명예회장 김블라디미르(78)는 “파르티잔스크는 독립군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라며 “극동에서의 한인 운동사를 어린 세대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책을 동포 학자들과 함께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르티잔스크/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한겨레]2005-09-06 02판 13면 1995자
파르티잔스크. ‘빨치산의 도시’란 뜻으로,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은 시호테알린산맥이 마지막 요동을 치는 곳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인 파르티잔스크의 풍광은 처음 찾은 한국인한테도 낯설지 않다. 떡갈나무로 덮인 해발 1천m 안팎의 산들은 강원도를, 거기에서 내려온 물길이 적시는 들판은 경기도를 떠올리게 한다. 19세기 중반 이후 기근과 폭정, 농민반란 끝에 러시아로 건너간 10만~20만명의 조선 농민들이 ‘기회의 땅’으로 삼은 곳 가운데 하나가 당시 수청(水淸)으로 불린 이곳이다. 신영동, 동개터, 다우지미, 큰령 등 한인 정착촌이 발달한 파르티잔스크는 대한제국 패망과 러시아혁명을 거치며 연해주 한인 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른 곳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조국을 빼앗긴 분노, 홍범도와 김경천 등 독립군 지도자들의 활동, 땅 없는 농민들의 처지 등이 이곳에 빨치산 운동의 불을 지폈다. 이 복판에 한창걸(1892~?)이 있다.
한창걸은 한-러 국경 근처인 연해주 하산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5년 러시아군에 징집돼 독일 전선에 참전한 그는 군사학교를 거쳐 장교로 임관했다. 1918, 2월 제대해 신영동(현 니콜라예프카마을)에서 한인 최초의 농민소비에트를 만들었다. 그러나 극동에서의 혁명은 백군(반혁명군) 및 외국간섭군의 반격에 부닥쳤다. 특히 일본은 1918, 4월 이후 병력 7만여명을 극동과 북만주 일대에 깔아놓고 연해주 침탈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인 80여명으로 빨치산부대를 만든 한창걸은 러시아인들과 함께 백군과 일본군, 미군과의 싸움에서 전과를 냈다. 산이 많은 파르티잔스크는 유격전에 알맞았다. 하지만 한창걸부대는 1919년 4월 일본군과 백군이 진격해 오면서 희생자를 내고 퇴각했다. 그 해 11월 무기 지원 약속을 받고 백군 내부의 반란에 참가한 한창걸은 체포돼 일본군한테 넘겨져 고문에 시달렸다. 다음해 1월 빨치산부대의 블라디보스토크 진격으로 구출된 그는 파르티잔스크로 돌아와 부대를 재건하고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1920년 4월 일본군은 연해주 각지를 기습해 최재형 등 한인 지도자들을 포함해 한인과 러시아인 5천명을 살해하는 ‘4월 참변’을 일으켰다. 사상자를 내고 물러난 한창걸부대는 연해주를 떠돌며 싸움을 계속했는데, 한창걸은 1921년 1월 만주에서 연해주로 이동한 독립군이 주축이 된 임시군사위원회 군정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강국모가 이끄는 혈성단과 연합한 한창걸부대는 그 해 8월께 일본군 장교 출신인 김경천을 사령관으로 추대해 800명 규모의 부대와 사관학교를 만들었다. 김경천은 부대원들에게 “이국 땅에서 우리의 철천지 원수 일본군을 공격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하자”고 연설했다. 김경천과 한창걸은 파르티잔스크에서 일본군의 후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을 퇴치하며 농민들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이후 한창걸부대는 1922년 ‘올가만 해방 전투’ 등에서 연승하고, 일본군이 완전 철수해 그 해 10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활약을 펼쳤다. 한창걸은 내전이 끝날 무렵 한인 빨치산 연합조직인 고려혁명군정청 위원에 선임됐다.
한창걸부대는 해산 뒤 ‘붉은 별’이라는 협동농장을 만들었고, 그는 1930년대에 하바로프스크 근처의 비로비잔 유대인 자치주 내무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1930년 후반 스탈린 체제에서 숙청당했는데, 그 최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파르티잔스크의 니콜라예프카마을은 한인사회당 중심인물이자 코민테른 집행위원을 지낸 박진순의 고향이기도 하다. 스탈린 체제 이전까지 한인들이 논농사를 짓던 니콜라예프카는 이제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온 동포 10여가구가 섞여 사는 전형적인 러시아 농촌마을이 됐다. 파르티잔스크는 1970년대에 중국식 이름을 버리고 혁명에 몸바친 빨치산들을 기리는 이름을 얻었다. 현지 고려인협회 명예회장 김블라디미르(78)는 “파르티잔스크는 독립군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라며 “극동에서의 한인 운동사를 어린 세대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책을 동포 학자들과 함께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르티잔스크/이본영 기자 eb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