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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 까레이스키(고려인) 행적을 밟다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10-08-12 00:00:00조회63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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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아시아에 정착 후 단란한 삶을 살았던 고려인 모습

 

 

독립운동가 후손, 까레이스키(고려인) 행적을 밟다 

2010년 08월 11일 (수) 00:29:46
일제가 빼앗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국내뿐만 아니라 타국에서 목숨까지 바쳐가며 투쟁해야 했던 우리 선조들. 경술국치 100주년과 광복 65주년을 맞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후
그곳에서 터를 닦아 ‘고려인’으로 살아간
그들과 후손, 그리고 국내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함께 담았다.


“나는 러시아어로 말하고 글을 쓰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다. 다른 고려인들도 한국인이고 싶어 한다. 어디를 가나 나는 한국인이다.”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는 고려인 동포 문학가 아나톨리 김-

한민족 의식 강해… 시련 이기고 꿋꿋이 이겨내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러시아 및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러시아연방에 한국인 모습과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흔히 ‘까레이스키’라고 불리는 그들은 스스로 ‘꼬레 사람’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거주하는 조선족과 달리 이들은 ‘고려인’으로 통한다.

고려인의 역사는 약 1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3년에 시작된 북방개척이민에서 1910년대 일제에 항거한 항일 독립운동을 위한 무대로 자리 잡았다. 처음에 불과 13가구였던 고려인은 20만 명을 넘어섰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민족주의가 발동하면서 국내보다 외국이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을 내린 독립운동가들은 연해주 등지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40여 년이 흐른 현재 러시아, 만주, 카자흐스탄 등 러시아연방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은 약 55만 명에 달한다. 이들은 대부분 3~5세대이며, 현지인들과 어울려 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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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해주 파르티잔스크에서 항일의병활동을 펼친 고려인


◆ 연해주, 항일운동 근거지

독립운동가로 주를 이뤘던 고려인들은 촌락을 만들어 생계유지와 독립군 후원을 위해 다양한 생산 활동을 펼쳤다. 일부는 노동에 종사했으나 대부분이 콩과 옥수수 등 작물과 벼농사를 지었다. 경작만으로는 수익이 턱없이 부족했으나 고려인 동포사회와 독립운동기지 기반을 다지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이들은 농민을 가장한 독립투사들이 대다수였기에 항일운동의병을 직·간접적으로 도왔다. 의병활동에 참가한 고려인들은 7만여 명에 이르게 됐다. 의병군들이 조직한 단체로 13도의군 성명회, 권업회 등이 있었다.

(사)고려인돕기운동본부(운동본부, 회장 황혜수)에 따르면 고려인 동포 지도자들은 교육과 언론을 통해 민족혼을 키우기 위한 사업으로 문화 활동, 학교설립, 신문발행을 전개했다. 연해주 고려인 동포학교는 11곳이었으며, 사법학교도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도 고려인 동포학교가 3곳이나 있었다.
 

  
▲ 홍범도 장군 사진을 들고 있는 홍 장군의 딸

◆ 독립운동가 행적, 역사 속으로 묻히다

홍범도 장군은 연해주에서 활동한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한반도에서 연해주로 활동무대를 옮겼던 홍 장군은 항일 의병군의 총대장으로 나라 되찾기에 적극 나섰다. 그의 활동은 모스크바에서 레닌에게 손수 권총 선물을 받을 정도로 구소련정부에서도 인정받았다.

홍 장군 외에도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 계봉우, 장도빈, 강상진, 김규면, 신채호, 최재형 선생 등이 연해주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공적은 역사 속에 묻혔다. 특히 홍범도 장군은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1937년 연해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카자흐스탄 시골마을에서 크질오르다 조선극장경비로 지내다가 1943년 10월 25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홍 장군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이 점점 묻히고 있다. 아울러 그들의 후손들은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 계속된 시련

고려인들의 시련은 계속됐다. 1920년 4월 연해주 신한촌에서 고려인들이 끔찍하게 죽어갔다. 이뿐만 아니라 프리모르스키 크라이의 남쪽에 위치한 우수리스크에서 76명의 한인들이 참변을 당했다. 이는 일제가 벌인 잔인무도한 소행이었다.

신한촌 사건과 우수리스크 참변(4월 참변)의 후유증도 가시지 않은 채 1937년 가을, 스탈린 정권은 연해주에서 거주했던 고려인들을 당시 구소련 정권에 반하는 민족으로 구분해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들은 기차에 몸을 실고 40일간 중앙아시아로 떠나야만 했다.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지만 당황할 겨를도 없었다. 고려인들은 매일 배고픔과 싸워야 했으며,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슬퍼할 수도 없었다.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오채선 고려인문화농업교류협력회 회장은 “강제이주로 고려인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이들은 집도 재산도 전부 잃고 난민처럼 지내야만 했다”면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말이 아닌 러시아어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고려인 4~5세대들은 우리말을 거의 모른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 구소련의 해체와 신생독립국가들의 탄생으로 고려인들의 삶은 다시 불안정해졌다. 다시 연해주로 돌아온 고려인이 있는가 하면, 강제이주된 곳에서 정착해 삶의 터전을 일군 이들도 있었다. 다른 구소련 내 소수민족과 달리 모국으로 귀국할 수 있는 지원프로그램이 없을 뿐더러 반겨주는 나라도 없었기에 고려인들은 억척스레 살아야만 했다.

중앙아시아 신생독립국가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면서 타민족을 배척했다. 소수민족인 고려인들 역시 차별의 대상이었다. 독립국가들은 자국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키로 했고, 이민족 차별정책을 심화했다. 외국어라고는 러시아어밖에 할 줄 모르는 고려인들은 그 나라의 말을 모른다는 이유로 취업을 할 수 없었다.

대부분이 공무원 교사 의사 연구종사자 등 전문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던 터라 사태는 심각했다. 짧은 시간에 그 나라 언어를 습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심지어 집과 재산을 버리고 떠나라는 협박편지를 받을 정도였으며, 전문직 종사자들은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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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이 민족의 혼을 잇기 위해 어린이 교육에 힘쓰고 있다.


◆ 고려인에게 희망을

최근 힘겹게 살아가는 고려인을 도울 수 있는 법안이 나와 고려인들에게 희망이 생겼다.

지난 4월 한나라당 이범관 국회의원(이천·여주)이 대표 발의한 ‘고려인 동포 합법적 체류자격 취득 및 정착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 이로써 무국적 고려인이 거주국에서 국적 등 합법적 체류자격을 취득할 수 있도록 우리정부가 외교적으로 지원하고 그들의 권익 증진과 생활 안정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민간 차원의 교류와 지원이 꾸준히 이어져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운동본부 관계자는 “한민족 특유의 민족정신을 발휘해 진정한 한민족 네트워크를 만들어 내야 할 때”라며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정과 하나 됨의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민간단체들은 고려인들이 기초적 생활을 하고 현지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아울러 한글 및 한국문화를 전파하며, 한민족 네트워크를 통해 그들이 한민족임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관계자는 이어 “일회성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고려인 사회와 연관된 일들을 꾸준히 이끌어 갈 민간기구가 필요하다”며 “이러한 지원·협력 사업은 우리 세대의 역사적 과업”이라고 말했다. 대륙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이 가진 잠재력은 세계로 향하는 한민족의 큰 자산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사진제공: (사)고려인돕기운동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