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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동포감동 - '신 갈리나'씨 노래와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12-09-12 00:00:00조회64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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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 이육사.
그런 이육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고,
고문 중 숨을 거둔 이육사의 시신까지 손수 수습한 주인공.

바로 여성 독립 운동가 이병희 할머니다.

 

1934년 일제치하의 경성.

할머니는 16세의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항일 노동운동을 주도한다.
그 혐의로 구속돼 죽음보다 더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4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후에도 북경으로 건너가
이육사 선생과 독립운동을 계속 했던 할머니.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지만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할머니는 광복 후 지난 50년 동안 침묵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그의 하나뿐인 아들조차 어머니의 과거를 몰랐을 정도라고....
그러나 조국을 위해 청춘을 바쳤던 그 시절을 할머니는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채 할머니의 가슴속에서만 살아 숨 쉬던 치열한 역사의 현장.
조국 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던 이병희 할머니의 삶의 여정을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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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20만 고려인의 패티김'이라 불리는 고려인 4세 신갈리나(52)씨.

 

아무리 실력이 우수해도 고려인을 무대에 세워주지 않는 우즈베키스탄이지만
그녀에게만큼은 예외였다.
우연히 신갈리나 씨의 노래를 들은 우즈만 호드자예프,
당시 우즈벡 대통령이 그녀의 노래에 감탄해 직접 그녀를 초청,

보통 40여 년 이상 경력이 된 자국 가수에게나 주는
'공훈가수'의 칭호를 수여한 것이다.

 

고려인에다가 20여 년간 고려(한국) 노래만 고집해 온 그녀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지만, 이후 신갈리나 씨는 러시아 및 구소련 각국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고려인에게 노래를 통해 희망을 전하기로 다짐한다.

 

한국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독학으로 한국어를 익히고,
한국 노래가 금지된 무대에서 한국 노래를 불러
수일동안 감금 처벌을 받기도 한 신갈리나 씨.

각국에 흩어져 있는 고려인의 설움을 달래주며 활약하고 있는
그녀의 노래에 조용히 귀 기울여 보자. (사미인곡 게시판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