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들과의 교류협력 및 지원협력사업에 대한
새소식 내용을 알려드립니다.
안중근의 위대한 여정 ⑴] 잊혀진 사람들을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6-07-06 00:00:00조회538회
어릴 적,아버지의 서가에는 빛바랜 초록색 표지의 ‘조선총독부’ 다섯 권이 꽂혀 있었다. 지은이는 유주현. 막 독서에 흥미를 느끼던 초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그 소설에 도전했지만,완독에는 실패했다. 덕분에 그 첫 장면은 수없이 읽었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하얼빈 역,프록코트를 입은 이토 히로부미,그리고 일곱 발의 총성. 지금도 내게 그건 기나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지난 10월 11일,블라디보스톡에서 슬라비안카로 가는 카페리 객실에 앉아 끝내 읽지 못한 그 소설을 떠올렸다. 내가 안중근에 대한 소설을 쓴다면,첫 장면은 막 잘려나간 왼손 무명지 첫 마디에 대한 묘사가 될 것 같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손가락. 나는 연추(러시아명 얀치허) 하리(下里)를 출발해 하얼빈을 거쳐 뤼순에 이르기까지,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안중근의 행로보다는 그 손가락의 행방이 더 궁금했다.
안중근이 김기룡,강기순,박봉석 등 결사동지 11명과 손가락을 자른 것은 1909년 2월 7일의 일.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자서전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무명지를 자른 뒤 생동하는 선혈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 글자 넉자를 크게 쓰고 대한민국 만세를 세번 부른’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전한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을 오늘 우리 모두 손가락을 끊어 맹서하자”며 일제히 손을 끊었다.
안중근은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에게 신문을 받으며 단지동맹을 맺은 곳이 러시아와 중국의 경계인 연추 하리라고 했다. 옌치아,연추,카리,하리 등으로 알려진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지금의 크라스키노 부근이라는 게 대체적인 추측이다. 항구도시 슬라비안카에서 크라스키노까지는 50㎞ 남짓. 표지판도,가로등도 없는 비포장도로를 먼지구름과 함께 1시간 남짓 달리다보면 차창 밖 밤하늘에 은하수가 무더기로 쏟아지는 변경이다.
중국 훈춘과 국경을 접한 크라스키노는 소읍이다. 조금만 내려가면 두만강이 나오고 그 너머는 북한 회령 땅이다. 그 탓에 19세기 말부터 기근에 시달리던 한인들이 들어와 땅을 개척했다. 하지만 둘러봐도 보이는 동양인이라고는 호텔에 머물며 자국에서는 금지된 카지노만 즐긴 뒤,곧바로 돌아가는 부유한 중국인들뿐이다.
안중근은 이 소읍의 어디쯤에서 결의를 했을까. 크라스키노에서 훈춘 방향으로 마을을 벗어나면 바로 주카노프카 다리가 나오는데,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에서는 2002년 바로 이 다리 옆에 불꽃 모양의 단지동맹 기념비를 세웠다. 하지만 정작 손가락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연추 하리를 찾으려면 10여㎞ 더 들어가야 한다. 주카노보로 들어가는 길 왼쪽에는 우리나라의 남양 알로에 농장이 있다. 농장장은 고려인이지만,그는 안중근은 물론 인근에 300여곳이나 번성했다던 고려인 마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1937년 스탈린이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뒤,거기가 한인들이 일군 땅이었음을 기억하는 고려인은 거의 남지 않게 된 셈이다. 강제이주 후 러시아인들이 버려진 한인 가옥의 벽돌과 주춧돌을 날라다 새집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include Virtual="/sub_ban.html" -->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까닭에 주카노보 마을 주민들은 옛 한인들의 집터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잘 기억하고 있었다. 주카노보 마을에서 만난 알렉세이(35)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를 따라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은 억새밭을 헤치고 가면 거짓말처럼 우물,맷돌,벽돌,묫자리 등이 나왔다. 알렉세이는 내를 건너고 산모퉁이를 돌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길로 우리를 안내하더니 양옆으로 자란 억새에 가려져 잘 보이지조차 않는 작은 길, 그 길이 끝나는 산 밑을 가리켰다. 아,연추 하리!
어릴 적,성묘하러 갈 때면 길 가운데 자라난 풀 때문에 자동차가 쉽게 다니지 못하던 그런 풍경이 떠올랐다. 차에서 내려 길을 걸어가노라면 금방 새 소리와 풀 냄새와 손등에 와 닿는 바람 때문에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그런 길이었다. 모르긴 해도 안중근이 살았던 시절에는 양옆으로 논이 있었을 것이다. 이 맘 때쯤이면 한창 추수를 할 시기이니 그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풍성했을 것이고.
우리는 기슭을 향해 30분 남짓 서둘러 걸었고 거기에는 안중근이 무명지를 자른 동네가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담장으로 사용했음직한 돌무더기와 집터에만 자란다는 주황 꽈리가 홀로 피어 마을의 흔적을 전할 뿐.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12명 결행의 흔적은 모진 세월에 마모되고 말았다.
연추 하리에서는 나라를 잃고 유랑에 나선 조선인의 마음으로 산과 들을 바라봐야만 한다.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산을 뒤로 하고 양지 바른 곳에다가 집을 지었을 것이다. 연추 하리는 그렇게 지은 집들이 대여섯 채 서 있는 마을이었다. 회령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안중근은 그런 집 어딘가에서 나라를 위한 마음을 보이겠노라며 손가락을 잘랐다. 손가락은 아마도 그 들판 어딘가에 묻혔을 테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연추 하리에서 역사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잊혀진 것들을 기억하는 일,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일이다. 안중근의 손가락이 묻힌 곳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억새밭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뿐이다. 바람이 불면 전면적으로 억새풀들이 몸을 누인다. 그게 바람이다. 바람은 인간의 길을 노래한다. 쉽게 변하든 그렇지 않든,인간은 걸어간길을 통해 자신을 밝힐 뿐이다. 여기서 한 사람이 손가락을 잘랐다. 그 손가락이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김연수(소설가)
◇글쓴이 김연수는
김연수씨는 연작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2003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차세대 소설가입니다.1970년 경북 김천 출생으로 93년 시로 등단한 이후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 국도' '굳빠이 이상' 등 장편소설을 통해 개인의 기억과 사회적 체험을 탄탄한 서사구조 속에 녹여내는 역량있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11일,블라디보스톡에서 슬라비안카로 가는 카페리 객실에 앉아 끝내 읽지 못한 그 소설을 떠올렸다. 내가 안중근에 대한 소설을 쓴다면,첫 장면은 막 잘려나간 왼손 무명지 첫 마디에 대한 묘사가 될 것 같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손가락. 나는 연추(러시아명 얀치허) 하리(下里)를 출발해 하얼빈을 거쳐 뤼순에 이르기까지,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안중근의 행로보다는 그 손가락의 행방이 더 궁금했다.
안중근이 김기룡,강기순,박봉석 등 결사동지 11명과 손가락을 자른 것은 1909년 2월 7일의 일.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자서전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무명지를 자른 뒤 생동하는 선혈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 글자 넉자를 크게 쓰고 대한민국 만세를 세번 부른’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전한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을 오늘 우리 모두 손가락을 끊어 맹서하자”며 일제히 손을 끊었다.
안중근은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에게 신문을 받으며 단지동맹을 맺은 곳이 러시아와 중국의 경계인 연추 하리라고 했다. 옌치아,연추,카리,하리 등으로 알려진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지금의 크라스키노 부근이라는 게 대체적인 추측이다. 항구도시 슬라비안카에서 크라스키노까지는 50㎞ 남짓. 표지판도,가로등도 없는 비포장도로를 먼지구름과 함께 1시간 남짓 달리다보면 차창 밖 밤하늘에 은하수가 무더기로 쏟아지는 변경이다.
중국 훈춘과 국경을 접한 크라스키노는 소읍이다. 조금만 내려가면 두만강이 나오고 그 너머는 북한 회령 땅이다. 그 탓에 19세기 말부터 기근에 시달리던 한인들이 들어와 땅을 개척했다. 하지만 둘러봐도 보이는 동양인이라고는 호텔에 머물며 자국에서는 금지된 카지노만 즐긴 뒤,곧바로 돌아가는 부유한 중국인들뿐이다.
안중근은 이 소읍의 어디쯤에서 결의를 했을까. 크라스키노에서 훈춘 방향으로 마을을 벗어나면 바로 주카노프카 다리가 나오는데,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에서는 2002년 바로 이 다리 옆에 불꽃 모양의 단지동맹 기념비를 세웠다. 하지만 정작 손가락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연추 하리를 찾으려면 10여㎞ 더 들어가야 한다. 주카노보로 들어가는 길 왼쪽에는 우리나라의 남양 알로에 농장이 있다. 농장장은 고려인이지만,그는 안중근은 물론 인근에 300여곳이나 번성했다던 고려인 마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1937년 스탈린이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뒤,거기가 한인들이 일군 땅이었음을 기억하는 고려인은 거의 남지 않게 된 셈이다. 강제이주 후 러시아인들이 버려진 한인 가옥의 벽돌과 주춧돌을 날라다 새집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include Virtual="/sub_ban.html" -->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까닭에 주카노보 마을 주민들은 옛 한인들의 집터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잘 기억하고 있었다. 주카노보 마을에서 만난 알렉세이(35)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를 따라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은 억새밭을 헤치고 가면 거짓말처럼 우물,맷돌,벽돌,묫자리 등이 나왔다. 알렉세이는 내를 건너고 산모퉁이를 돌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길로 우리를 안내하더니 양옆으로 자란 억새에 가려져 잘 보이지조차 않는 작은 길, 그 길이 끝나는 산 밑을 가리켰다. 아,연추 하리!
어릴 적,성묘하러 갈 때면 길 가운데 자라난 풀 때문에 자동차가 쉽게 다니지 못하던 그런 풍경이 떠올랐다. 차에서 내려 길을 걸어가노라면 금방 새 소리와 풀 냄새와 손등에 와 닿는 바람 때문에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그런 길이었다. 모르긴 해도 안중근이 살았던 시절에는 양옆으로 논이 있었을 것이다. 이 맘 때쯤이면 한창 추수를 할 시기이니 그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풍성했을 것이고.
우리는 기슭을 향해 30분 남짓 서둘러 걸었고 거기에는 안중근이 무명지를 자른 동네가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담장으로 사용했음직한 돌무더기와 집터에만 자란다는 주황 꽈리가 홀로 피어 마을의 흔적을 전할 뿐.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12명 결행의 흔적은 모진 세월에 마모되고 말았다.
연추 하리에서는 나라를 잃고 유랑에 나선 조선인의 마음으로 산과 들을 바라봐야만 한다.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산을 뒤로 하고 양지 바른 곳에다가 집을 지었을 것이다. 연추 하리는 그렇게 지은 집들이 대여섯 채 서 있는 마을이었다. 회령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안중근은 그런 집 어딘가에서 나라를 위한 마음을 보이겠노라며 손가락을 잘랐다. 손가락은 아마도 그 들판 어딘가에 묻혔을 테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연추 하리에서 역사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잊혀진 것들을 기억하는 일,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일이다. 안중근의 손가락이 묻힌 곳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억새밭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뿐이다. 바람이 불면 전면적으로 억새풀들이 몸을 누인다. 그게 바람이다. 바람은 인간의 길을 노래한다. 쉽게 변하든 그렇지 않든,인간은 걸어간길을 통해 자신을 밝힐 뿐이다. 여기서 한 사람이 손가락을 잘랐다. 그 손가락이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김연수(소설가)
◇글쓴이 김연수는
김연수씨는 연작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2003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차세대 소설가입니다.1970년 경북 김천 출생으로 93년 시로 등단한 이후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 국도' '굳빠이 이상' 등 장편소설을 통해 개인의 기억과 사회적 체험을 탄탄한 서사구조 속에 녹여내는 역량있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