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들과의 교류협력 및 지원협력사업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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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촌 월동양식 지원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6-07-06 00:00:00조회596회
러시아의 자랑거리가 세 가지 있다면 첫 번째,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아가씨(=제부쉬까)와 두 번째, 보드카, 그리고 넓은 시베리아 영토에 매장되어 있는 풍부한 영토이다.
반면에 러시아에 자랑치 못할 좋지 않은 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혹독한 추위와, 대낮에도 보드카를 들고 다니는 술취한 러시아 남자와, 안 좋은 도로사정이다.
12월 23일부터 연해주 정착촌 주민들에게 월동 양식을 나누어주기 위해 시작한 우리의 발걸음은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
크레모보 정착촌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최황철 아우와 오레호붜 농장에서 정비기사로 있는 정여래 아우와 우리는 크리스마스도 연말도 뒤로 한 채, 오직 정착촌 주민들에게 양식을 전달해 주기 위해 출발하였다.
우수리스크에서 차로 2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플라타노프카라고 하는 정착촌으로 먼저 출발하였다. 정착촌은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재 이주해 온 고려인 중 오갈 데 없는 고려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식구가 여섯 명인데, 양식이 다 떨어져서 감자로 만든 마카로니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는 소식을 한달 전부터 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조급했다.
예로부터 그 어느 것보다도 쌀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있는 한민족은 배고픈 시절을 많이 겪어서인지 고려인들도 쌀을 귀히 여기고, 쌀을 나누어주면 무척이나 고마워하였다. 비록 주식은 쌀보다는 빵인 고려인들도 한민족의 피가 흘러서인지 쌀을 받으면 무척 고마워 어쩔 줄을 몰라한다.
오후쯤 플라타노프카에 도착하여 양식과 이랜드에서 지원한 월동의류, 그리고 나주 한영사에서 후원해 주신 학용품 등을 나누어주고, 너무 어두워져서 고려인 마리나 가정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또 일찍 다른 지역으로 가기 위해 출발하였다.
간밤에 무척 추워지더니, 아침 기온은 영하 40도는 되는 것 같았다. 한 40분쯤 달려왔을까 싶은 그 때 이상하게 차에서 부동액 냄새가 나서 차를 세우고 엔진뚜껑을 열고 살펴보았다. 맙소사! 뚜껑을 여는 순간, 너무 추워서인지 부동액이 흐르는 호스가 터져서 부동액이 다 새어 있었다. 조금 있자 온도 게시판의 게이지가 갑자기 올라가더니, 그 순간 시동을 끈 후, 차는 다시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운전석 유리창은 반쯤 열려 있었고, 오늘은 명절이라 아무 차도 다니지 않는 때였다.
5분도 안되어서 발이 어는 것 같고,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바람과 함께 이대로 있다가는 얼어죽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도 안 되는 지역이고, 인근엔 마을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바라다 보이는 평원 위에 드리워진 야산 위로 해가 떠오르기만을 소원하면서 혹시 아침에 우유를 수거하러 다니는 차가 오지나 않을까 싶은 바램을 가지고 추위를 버텨나가고 있었다. 정말 살인적인 추위였다.
러시아 차들도 아침엔 시동들이 안 걸리기 때문에 이렇게 이른 아침에 차가 다니기를 기대하기란, 더군다나 이런 오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40분쯤 지났을까? 왼쪽 백미러로 멀리서 불빛을 비취며 차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나가서 양팔을 벌리고 차를 세웠다.
왜냐하면 러시아에서는 대낮에도 범죄가 무서워 차를 세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도로를 막고 있으니 트럭이 섰다. (멀라꼬)라고 쓰여 있는 우유 수거차였다.
아침부터 러시아 운전사 아저씨는 술에 취해 있었다. 다행히 와이어로 차를 끌고 가서 우리는 첫 위기에서 모면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플라타노프카'라는 지역에는 정비소도 없고, 견인차도 없는 오지중의 오지였다. 할 수 없이 크레모보에 전화를 해서 히터가 안 들어오는 더블캡 트럭을 불러서 우리는 또 교대로 차를 견인해서 우수리스크까지 세 시간 만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루종일 히터가 안 들어오는 냉장고 차를 타고 와서인지 무릎은 시리고, 몸은 동태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번 강추위로 모스크바 인근에서는 천여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영하 30∼40도의 추위 속에서 겨울 양식을 지원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는 나머지 지역을 강행하며 1월 7일까지 모든 지역의 지원을 끝마쳤다.
한국에서 뜻있는 분들이 한푼한푼 모아 주신 성금과 여러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이번 월동 양식을 지원하고 나니 내 마음 속에는 알 수 없는 희열이 북받쳐 올랐다. 이 양식으로 많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우리 동포 고려인들이 이 혹독한 겨울을 굶지 않고 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기만 하다.
이번 월동양식 지원은 단순한 쌀이 아닌 생명의 양식 지원이었던 것 같다.
-자원봉사자 김재영-
반면에 러시아에 자랑치 못할 좋지 않은 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혹독한 추위와, 대낮에도 보드카를 들고 다니는 술취한 러시아 남자와, 안 좋은 도로사정이다.
12월 23일부터 연해주 정착촌 주민들에게 월동 양식을 나누어주기 위해 시작한 우리의 발걸음은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
크레모보 정착촌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최황철 아우와 오레호붜 농장에서 정비기사로 있는 정여래 아우와 우리는 크리스마스도 연말도 뒤로 한 채, 오직 정착촌 주민들에게 양식을 전달해 주기 위해 출발하였다.
우수리스크에서 차로 2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플라타노프카라고 하는 정착촌으로 먼저 출발하였다. 정착촌은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재 이주해 온 고려인 중 오갈 데 없는 고려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식구가 여섯 명인데, 양식이 다 떨어져서 감자로 만든 마카로니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는 소식을 한달 전부터 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조급했다.
예로부터 그 어느 것보다도 쌀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있는 한민족은 배고픈 시절을 많이 겪어서인지 고려인들도 쌀을 귀히 여기고, 쌀을 나누어주면 무척이나 고마워하였다. 비록 주식은 쌀보다는 빵인 고려인들도 한민족의 피가 흘러서인지 쌀을 받으면 무척 고마워 어쩔 줄을 몰라한다.
오후쯤 플라타노프카에 도착하여 양식과 이랜드에서 지원한 월동의류, 그리고 나주 한영사에서 후원해 주신 학용품 등을 나누어주고, 너무 어두워져서 고려인 마리나 가정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또 일찍 다른 지역으로 가기 위해 출발하였다.
간밤에 무척 추워지더니, 아침 기온은 영하 40도는 되는 것 같았다. 한 40분쯤 달려왔을까 싶은 그 때 이상하게 차에서 부동액 냄새가 나서 차를 세우고 엔진뚜껑을 열고 살펴보았다. 맙소사! 뚜껑을 여는 순간, 너무 추워서인지 부동액이 흐르는 호스가 터져서 부동액이 다 새어 있었다. 조금 있자 온도 게시판의 게이지가 갑자기 올라가더니, 그 순간 시동을 끈 후, 차는 다시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운전석 유리창은 반쯤 열려 있었고, 오늘은 명절이라 아무 차도 다니지 않는 때였다.
5분도 안되어서 발이 어는 것 같고,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바람과 함께 이대로 있다가는 얼어죽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도 안 되는 지역이고, 인근엔 마을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바라다 보이는 평원 위에 드리워진 야산 위로 해가 떠오르기만을 소원하면서 혹시 아침에 우유를 수거하러 다니는 차가 오지나 않을까 싶은 바램을 가지고 추위를 버텨나가고 있었다. 정말 살인적인 추위였다.
러시아 차들도 아침엔 시동들이 안 걸리기 때문에 이렇게 이른 아침에 차가 다니기를 기대하기란, 더군다나 이런 오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40분쯤 지났을까? 왼쪽 백미러로 멀리서 불빛을 비취며 차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나가서 양팔을 벌리고 차를 세웠다.
왜냐하면 러시아에서는 대낮에도 범죄가 무서워 차를 세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도로를 막고 있으니 트럭이 섰다. (멀라꼬)라고 쓰여 있는 우유 수거차였다.
아침부터 러시아 운전사 아저씨는 술에 취해 있었다. 다행히 와이어로 차를 끌고 가서 우리는 첫 위기에서 모면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플라타노프카'라는 지역에는 정비소도 없고, 견인차도 없는 오지중의 오지였다. 할 수 없이 크레모보에 전화를 해서 히터가 안 들어오는 더블캡 트럭을 불러서 우리는 또 교대로 차를 견인해서 우수리스크까지 세 시간 만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루종일 히터가 안 들어오는 냉장고 차를 타고 와서인지 무릎은 시리고, 몸은 동태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번 강추위로 모스크바 인근에서는 천여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영하 30∼40도의 추위 속에서 겨울 양식을 지원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는 나머지 지역을 강행하며 1월 7일까지 모든 지역의 지원을 끝마쳤다.
한국에서 뜻있는 분들이 한푼한푼 모아 주신 성금과 여러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이번 월동 양식을 지원하고 나니 내 마음 속에는 알 수 없는 희열이 북받쳐 올랐다. 이 양식으로 많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우리 동포 고려인들이 이 혹독한 겨울을 굶지 않고 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기만 하다.
이번 월동양식 지원은 단순한 쌀이 아닌 생명의 양식 지원이었던 것 같다.
-자원봉사자 김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