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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즈스탄 고려인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9-05-21 00:00:00조회59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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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년전 짐승처럼 끌려온 그들

손발 부릅터가며 만든 삶의 터전...

구 소련 붕괴로 다시 나락으로

피눈물로 얼룩진 강제 이주史

국가적인 관심으로 조명해야 ...

키르기즈스탄에는 약 2만 정도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1937년 9월 차가운 바람이 쌀쌀하게 불어오는 어느 날부터 스탈린에 의해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가 시작됐다. 같은 해 11월 중순까지 124대의 수송열차에 3만6천442가구 17만1천781명의 고려인들이 아무런 영문도 모른 체 끌려갔다.

스탈린정권은 강제이주에 앞서 고려인동포 지식인과 지도자 2천500여명을 소리 소문 없이 데려갔으며 그들은 결국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화물열차를 개조해 만든 호송열차에 실려 연해주 라즈돌노예역에서 40여일 동안 6천여Km를 개 끌리듯 끌려온 고려인들은 황량한 황무지인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패대기 쳐졌다.

강제로 태워져 실려간 화물칸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고 추위와 질병과 굶주림이 겹쳤다.

대소변 등 생리적인 것은 오직 열차가 물과 석탄을 보충하기 위해 역에 잠깐 설 때만 해결할 수 있었다.

강제 이동 기간에 어린이 60%가 사망했으며, 여행 중 가족이 여러 열차로 흩어지는 바람에 이산가족도 발생했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도착한 뒤에는 이질, 장티푸스. 말라리아 같은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약 1만 여명이 사망했다.

한 겨울 살을 에는 삭풍과 함께 이 황무지에 도착한 고려인들은 맨손으로 토굴을 파겨우겨우 그해 겨울을 보냈다. 모진 겨울을 보내고 봄이 왔을 무렵 먹고살기 위한 식량 마련을 위해 물을 가둬 수로를 만들고, 갈대숲을 베고 늪을 갈아엎어 논과 밭을 만들었다. 그들이 손발을 부릅 터 가며 가꾼 이 황무지에 논농사와 목화를 재배해 황금의 땅으로 바꿔 놓았다.

고려인들은 1953년까지 강제이주동안 명시된 일정 거주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주이전의 제한 속에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 그래도 고려인 특유의 근면성, 성실성으로 소련연방이 자랑하는 1천2백여명의 노력영웅 중 750여명이 고려인이다.

강제 이주민이라는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억척스럽게 일을 해온 댓가였다.

당시 끌려간 고려인과 그들의 후손인 55만여명의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에 약 19만여 명, 카자흐스탄에 10만여 명, 러시아 등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1991년 소련 붕괴 후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은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중앙아시아는 보편적으로 회교도분리주의를 가지고 있는 전통적 민족주의 국가다.

이러한 국가에서 안정적 신분을 가지고 있는 고려인들은 무척 혼돈스러워 하거나 고초를 받고 있다. 일부국가에서는 '고려인은 너희 나라로 가라'며 노골적인 민족주의를 표현을 하고 있을 정도다. 자국민 보호정책으로 공용 언어였던 러시아어를 폐지하고 자국어를 사용함으로 인해 뒤늦게 또 다른 언어를 배워야 하는 고충도 적지않다. 자국민에 비해 세금 등 공공비용을 다르게 책정하는 등 차별화가 점점 노골화되면서 제2의 고향인 연해주로 다시 이주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형편에 놓여있는 한 고려인을 소개하려고 한다.

최 마리아 할머니(77). 최 할머니는 이곳에서 혼자 버겁게 살아가고 있다. 날마다 조그마한 손수레를 끌고 주변의 쓰레기통을 뒤져 종이상자, 작은 나무토막과 땔감 등 을 줍는다. 난방비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한 겨울 영하 30~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을 버텨낼 연료감으로 쓰기 위해서다.

그녀의 집안은 고급 관리직을 지냈던 남편 덕택에 외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잘 나가던 집안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구 소련이 해체되면서 중앙아시아의 회도교 민족정책에 의해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녀와 남편은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모스코바 까지 유학을 마친 엘리트 출신이었다. 키르기즈어를 모르는 그들은 직장을 그만 두어야 했고 남편마저 몇 해 전 숨져 홀로 외아들과 살고 있다.

집안이 무너지면서 외아들이 말썽을 피우기 시작해 그 많은 재산을 탕진한데다 지금은 마약에도 손을 대 그녀의 삶은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소액으로 나오는 적은 연금마저 나오는 날이면 아들이 어김없이 집으로 찾아와 그 돈을 가지고 나가 다시 마약을 한다고 한다.

필자가 방문 한날도 그녀는 작은 손수레에 음식물 찌거기가 묻어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나는 종이상자를 한 아름 가뜩 싣고 와서 부리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혹독한 겨울에 얼어 죽기 때문이다. 우리 돈으로 10여만 원남짓 될까 말가힌 연료비가 없는 까닭에.

그녀의 생활상을 들은 필자가 안타까운 마음에 얼마간의 용돈을 쥐어주자 눈물을 글썽이며 자꾸 집안으로 들어가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했다. 성화에 못 이겨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온 집안이 땔감으로 쓸 쓰레기 더미로 가득 차 앉을 공간 조차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무더운 날씨에 악취와 고약한 냄새마저 진동을 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낡은 집안,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할머니를 보고 눈물이 쏟아 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악취 나는 방안에서 얼기설기 차 한 잔을 마시고 도망치듯 뛰쳐나와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는 연해주에서 태어나 5살 무렵인 1937년 초겨울 아무 영문도 모른 상태에서 부모님과 함께 짐승을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에 실린채 이곳으로 끌려와 패대기 쳐진 이후 70년이 넘는 지금까지 버겁기 짝이 없는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닌 강제 이주 만행의 희생자들인 1세대들이 그렇게 소리없이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피눈물나는 삶을 이어왔는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작은 증언이라도 기록에 남겨야 한다. 그것에 대해 우리는 너무 소홀한 것 같다. 아니 관심조차 없는 듯하다. 이역만리 타향으로 짐승처럼 강제로 끌려가 고국을 그리며 힘겹게 살아온 강제이주 70여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신원해주어야 할 일이다.



사진/ 1.깊게 패인 얼굴 주름만큼이나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최마리아 할머니가 문밖까지 배웅을 나왔다.

2.집안이 온통 추운 겨울을 날 땔감으로 가득 쌓여있다.

4.거치른 들판에 온통 만개한 이름모를 들꽃들

5.근면.성실하기로 이름난 고려인들은 집안 텃밭을 가꾸어 수확한 야채를 시장에 팔기도 한다.

6.키르기즈인들의 거주지인 인 요르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