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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밥퍼 아줌마' 고려인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9-08-13 00:00:00조회6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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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퍼아줌마' 고려인 고계월씨

(공주=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우즈베키스탄의 자치공화국인 카라칼파크스탄에서 빈민구제활동을 하는 고려인 3세 고계월씨는 이 나라에서 `밥퍼 아줌마'로 통한다. 고씨는 공화국 내 고아나 홀로 사는 노인, 노숙자 등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마련해주는 봉사단체인 `폴라리스'를 지난해 창립해 운영하고 있다. 이 단체의 전신은 1993년 그가 창립해 유엔과 함께 일을 하는 등 이 나라의 유일한 봉사단체였던 `에크산'이다. 고씨는 `에크산'을 정부에 헌납했다
​고계월 씨 지난해 우즈벡 대통령상 수상

(공주=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우즈베키스탄의 자치공화국인 카라칼파크스탄에서 빈민구제활동을 하는 고려인 3세 고계월(59.여.마리나 고) 씨는 이 나라에서 `밥퍼 아줌마'로 통한다.

   고 씨는 공화국 내 고아나 홀로 사는 노인, 노숙자 등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마련해 주는 봉사단체인 `폴라리스'를 지난해 창립해 운영하고 있다. 이 단체의 전신은 1993년 그가 창립했던, 당시 이 나라의 유일한 봉사단체였던 `에크산'이다. 고씨는 `에크산'을 정부에 헌납했다.

   그는 재외동포재단(이사장 권영건)이 10일까지 공주대학교 한민족교육문화원에서 개최하는 독립국가연합(CIS) 지역 한국어 교사를 위한 집중 연수에 참가하고 있다.

   고씨는 7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폴라리스는 3명의 상주인원과 자원봉사자들의 희생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카라칼파크스탄과의 교류와 외교를 위해 한국 정부가 우리 단체에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그는 지난해 봉사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상을 받았다.

   서울 출생인 조부를 따라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그의 부친 알렉산드르 고(제주 고 씨로 밝힘) 씨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했고, 계월 씨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 공화국 수도인 누크스시 37학교와 수력발전 기사대학을 졸업한 그는 우즈벡 국립정치대학원을 나왔다. 1972년 농업건설부 공무원으로 들어가 수력발전소 분야에서 9년간 근무하다 1981년 카라칼파크스 공화국 수상과 부수상 다음인 서열 3위의 자리에 올라 12년간 24명의 장관을 지휘, 통솔했다.

   그는 "인구 200만 명 중 고려인 6천 명이 사는 우리 공화국의 가스와 물, 건축, 환경 등 기초생활에서 경제 전반까지 챙기는 일을 했는데, 한국으로 말하자면 `경제 부총리'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공화국의 고려인협회와 우즈베키스탄 고려문화협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와 `대장금', `주몽' 등이 수십 번 방송돼 우즈벡과 카라칼파크스탄에는 한류열풍이 불고 있다"며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글학교를 찾는 현지인이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37학교와 카라칼파크스탄 고려문화센터에서 한글교사로 봉사하고 있는 그는 "1998년 7명이던 학생이 지금은 300명으로 늘어났다"며 "한국에 방문취업제로 입국하려는 사람들도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교재가 부족해 복사를 해 사용하기도 했다"고 술회한 그는 "시청각 자료와 전통문화를 가르칠 수 있는 보조 교구 등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불편함을 없애려고 지난해 선교사와 함께 `한-카라칼파크사전'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한국말을 못하는 고려인에게 `당신들은 러시아사람'이라고 할 때면 마음이 아프고 서운하다"며 "우리도 한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고, 한국인임을 너무도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만큼 같은 한국인으로 봐달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1999년 처음 방한했을 때 서울 남산에 올라 감격에 젖어 펑펑 울었다는 그는 당시 한국말을 전혀 못해 부끄러웠고, 그 길로 국제교육진흥원으로 들어가 한국어를 배웠다고 전했다.

   고려인 이미론 씨와 사이에 2녀를 둔 그는 "죽는 날까지 고려인 후손들을 한국인으로 잘 키우고, 자랑스러운 한민족임을 심어주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