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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70년] (14)좌절딛고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7-10-07 00:00:00조회621회

'우즈벡 태권도 대부' 이고르 리씨 "2009년 국제대회 유치"

"내년에 우즈베키스탄 체육대학에 태권도학과를 개설하고 2009년 4월 열릴 세계태권도대회를 이곳에 유치할 계획입니다" 88서울 올림픽 이전까지 우즈벡에는 가라테가 유일한 무도였었다. 그러나 고려인 3세인 이고르 리(55)씨가 태권도를 보급하면서 태권도인은 2만여 명으로 늘어났고, 가라테 인구는 급감하고 있다.
현재 우즈벡 태권도협회 고문을 맡고 있는 리씨는 1988년 프로스펙스사로부터 태권도 도복을 선물로 받았으나 그 도복을 입은 채 가라테를 할 정도로 당시에는 태권도를 전혀 몰랐다. 그가 태권도에 눈을 뜬 것은 1989년 북한의 국제태권도연맹 최홍희 회장이 이끄는 시범단이 우즈벡을 방문하면서부터다.

"절도 있고 힘이 있어 보이는 태권도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또 태권도에 깃들어 있는 정신세계는 정체성을 잃어가는 고려인 후손에게 무엇보다 좋은 운동이고, 무도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리씨는 폴란드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활동하고 있는 최홍희 회장의 아들을 불러들여 고려인과 우즈벡인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도록 했고, 가라테 챔피언까지 지낸 그는 직접 도복을 입고 태권도를 배웠다.

또 그는 한국을 방문해 국기원에서 집중교육으로 태권도를 수련해 2단증을 딴 뒤 본격적으로 후진양성에 나섰다. 리씨는 최홍희 회장으로부터 명예 4단증을 받기도 했다.

남북한을 오가며 태권도 발전과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리씨는 국제대회에서 우즈베키스탄에 은메달을 처음으로 안겨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우즈벡 태권도 대부'로 불리면서도 지금까지 고문만 맡아서 활동할 뿐 회장 자리에 앉지는 않았다. 전면에 나서기 보다는 뒤에서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낫다는 판단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각종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번 돈을 태권도 육성에 투자했다. 또 김매자 무용단 60명을 초청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고려인에게 한국의 전통문화를 선보이는가 하면 남북한 예술인들의 공연을 후원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태권도 사범을 파견해줬으면 좋겠다"는 리씨는 태권도 대회 때 마다 경기장을 임대해서 사용하는데 태권도 전용경기장을 건립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리씨의 할아버지(이태문)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연해주 프리모예프로 건너가 살다 1937년 우즈베키스탄 쿠일룩으로 강제이주됐고, 이 곳에서 대규모로 파와 수박 농사를 지어 '노력영웅' 훈장 칭호를 받았다.

아버지 이병철씨와 어머니 최마르파씨 사이의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리씨는 레닌그라드대 임업학과를 나와 처음에는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지었고, 당시 쿠일룩 일대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번 고려인으로 이름이 나기도 했다.

"태권도를 배우려면 필연적으로 한국말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우즈벡 내에서 태권도 보급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상징적으로 국기원 우즈벡 지부를 설치해주면 이 나라를 중앙아시아의 태권도 요람으로 성장시킬 자신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