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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70년] (15)좌절딛고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7-10-07 00:00:00조회553회

강제이주 후 북한정권 수립 가담 정상진씨

"그날 블라디보스토크 역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어. 마중나온 가족들과 친구들은 통곡하며 땅바닥을 쳤지."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고려인 정상진(鄭尙進.90)씨는 70년 전 소련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를 기억하는 얼마 남지 않은 산증인 중의 한 명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조선사범대학 학생이던 그는 강제이주된 뒤 소련군에 입대했다가 북한으로 넘어가 남한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까지 올랐다가 숙청당해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쫓겨왔다.

1937년 9월25일. 그날은 이후 고려인 18만명을 희생자로 만든 기나긴 강제이주 행렬의 시작이였다.

첫 번째 강제이주 열차를 타고 그는 조선사범대의 다른 학생들과 고려극장 배우, 고려라디오 방송국 직원, 선봉신문(레닌기치신문의 전신) 기자들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떠났다.

젊은 조선인들은 조국 해방의 큰 뜻에만 고민을 집중하던 때였고 정씨 개인적으로는 며칠 전 아버지가 소련 군인들에게 갑자기 끌려간 뒤 소식이 없어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강제이주 전에는 고려사람들이 사회주의를 하늘처럼 믿었지만 그날 이후 (사회주의의) 모든 신념을 잃었다"며 "열차에 탄 사람들은 암울한 현실을 다룬 김동환의 시 '손톱으로 새긴 노래'를 읊으며 한탄했다"고 회고했다.

정씨는 "강제이주 자체가 고려 민족에 대해 말로 표현 못할 모독이었지만 우리는 수치스럽고 야만스러운 일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며 "하지만 고려민족은 죽지 않고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렸다"고 말을 이었다.

카자흐스탄 남서부 크즐오르다 지역에 정착한 그는 함께 자리를 옮긴 조선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이곳 쉬콜라(초.중.고교)에서 교편을 잡아 러시아문학을 가르쳤고 이후 '조선해방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소련군 해병대에 입대했다.

소련군으로 웅기, 나진, 청진 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그는 해방 후 '고려인들은 북한인민정권 수립에 참가하라'는 소련정부의 명령을 받고 북한의 공산당 정권에 참여했으며 이후 1957년 김일성의 '반소'정책에 의해 숙청당할 때까지 10여년간 조국 한반도에서 생활했다.

카자흐스탄에 돌아온 그는 재소련 한인 신문인 레닌기치신문(현 고려신문)의 기자로 30여년간 근무했다.

"요즘 아이들(고려인들)은 모국어도 잊었고 강제이주도 잘 알지 못한다"며 한숨을 내쉬는 그는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민족 특유의 부지런함과 교육열 덕택"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남의 나라까지 와서 공부를 못하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이 때문에 조국의 해방을 위해 죽기살기로 공부했었다"며 "이곳(카자흐스탄)의 고려인이나 한국의 학생이나 강한 의지가 없어 보이는 게 걱정"이라고 말했다.

추방된 뒤에는 한 번도 북한에 가지 않은 그는 1992년 남한이 카자흐스탄과 국교를 수립한 이후에는 꾸준히 강연회 등의 목적으로 한국을 찾고 있다.

정씨는 "고려인 강제이주의 한(恨)을 위로받기 위해서는 조국이 통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조국 통일을 보는 것이 마지막 남은 소원"이라며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꼭 평화협정이 체결됐으면 좋겠다"고 희망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