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강제이주 70년> (2)이주 역사와 수난 극동.중앙亞 넘나든 표트르 채 할아버지의 인생 역정
(하바로프스크=연합뉴스) 김병규 기자 = "매일 매일 기다렸어. 고아원 철문을 붙잡고. 꼭 돌아오겠다는 할머니 말을 믿었지만 편지도 한통 오지 않았어. 그래도 울면서 할머니가 오기만 기다렸어."
고려인 2세인 표트르 채(79) 할아버지는 아직도 1937년 그날만 생각하면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은 아홉 살 응석받이던 채 할아버지를 천애 고아로 만들어버렸고 이 때부터 중앙아시아와 극동 러시아를 떠도는 고단한 삶이 시작됐다.
채 할아버지가 고향인 경남 사천을 떠나 연해주 땅으로 온 것은 두 살 때인 1930년. 할머니와 부모 등에 업혀 두만강을 건넌 그는 연해주 달레네친스크 지역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새로운 희망을 꿈꿨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주 후 5년이 지난 어느 날 밤 아버지는 동네의 다른 어른들 20여 명과 함께 영문도 모른 채 러시아 군인들에게 잡혀가 돌아오지 않았고 수개월 뒤 어머니 역시 농사일을 하다가 쇠뿔에 받혀 시름시름 앓다 결국 세상을 떴다.
당시 머나먼 타국에 남은 혈육은 할머니뿐이었지만 2년 뒤 할머니 역시 중앙아시아행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야만 했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 때문이었다.
현재 하바로프스크시의 한 외곽마을에서 살고 있는 채 할아버지는 그날을 회상하다 "'꼭 돌아오겠다'는 할머니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할머니와) 함께 가겠다고 울어도 보고 떼도 써봤지만 도리가 없었다. 할머니는 '(너는) 아직 어리니 잠깐만 고아원에서 기다리고 있어라'며 억지로 웃었지만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고 회상했다.
채 할아버지는 "(내가) 고아원에 들어간 뒤 할머니가 철문 앞에서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멍하게 내 쪽을 쳐다봤다"며 "살아 계신다면 100세가 넘었을 텐데 나는 (할머니가) 어떻게 사셨는지, 살아계셨는지 돌아가셨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고 흐느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고아원에서 나온 할아버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막노동을 하며 돈을 모아 할머니를 찾으러 중앙아시아행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다.
고생 끝에 한국인이 모여 산다는 타슈켄트(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에 도착했지만 채 할아버지 앞에 할머니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강제이주 도중 많은 고려인들이 열차에서 죽었으며 강제이주 후에도 허허벌판에서 굴을 파고 살았을 정도로 힘들게 생활했다는 불안한 이야기만 들렸다.
식음을 전폐하던 그에게 찾아온 것은 할머니가 아니라 역병 말라리아였다.
사경을 헤맨 끝에 겨우 건강을 회복한 그는 다시 극동지방으로 돌아왔고 이후 하바로프스크에서 40여 년을 벌목 노동자로 일해왔다.
채 할아버지의 마지막 꿈은 비록 할머니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할머니가 살던 조국에 돌아가 생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한국 정부에 '강제징용자 후손 영주귀국'을 신청해 놨지만 언제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부인 천금순(75) 할머니의 부모만 강제징용자일 뿐 그의 부모는 자진해서 연해주로 건너온 이주자로 분류돼 다른 사할린 강제징용 동포들에 비해 순위가 밀렸기 때문이다.
"이 영감 한국 가고 싶어 죽으려고 해요"라며 할아버지를 가리키는 천 할머니의 말에 다시 눈물을 글썽이던 채 할아버지는 "한국 이름도 벌써 지어놨다"며 서툰 한글로 '채 뾰돌(표돌)'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종이에 써 보여줬다.
"조선 사람들 모여있는 곳에서 살 생각을 하면 마음이 좋아져. 죽기 전에 꼭 경상도에 가야 해. 할머니랑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거기 살았었잖아. 채씨들 모여 사는 곳이 있다는데 꼭 거기 가보고 싶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