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강제이주 70년> (5)수난의 역사 독립운동가 김승빈씨 아들 유리 김씨 "항일투쟁 아버지 '독립유공' 인정해야"
(하바로프스크=연합뉴스) 김병규 기자 = "아버지가 소련군에 입대한 것은 다름이 아닌 조국 해방을 위해서입니다. 하루 빨리 아버지가 대한민국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러시아 극동지방의 하바로프스크시에 살고 있는 고려인 2세 유리 김(70)씨는 옛 러시아 신문 기사나 관련 문헌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찾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항일무장 투쟁가인 그의 아버지 김승빈(金勝彬.1895-1981)씨가 소련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일본과 싸워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소련군 참여를 선택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를 모아 조만간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할 계획이다.
평양 출신으로 순종의 궁궐수비대에서 근무하던 김승빈은 평양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가 쫓기는 신세가 돼 만주로 넘어갔다.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서로군정서를 지청천(池靑天.1888-1957) 선생과 함께 이끌기도 했다. 김승빈은 이후 연해주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 각각 사범전문학교와 한인학교를 열고 민족교육을 실시했고 국경수비대에서 근무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소련군에 있던 항일 운동가들이 북한 정권에 참여한 것과 달리 김일성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는 소련에 남아 있다가 1959년 대위로 전역했고 연금생활 중인 1981년에 사망했다.
김씨는 "아버지는 조국의 해방과 지식을 쌓는 일, 두 가지만을 생각하고 사신 분"이라고 회고하면서 "특히 해방을 앞두고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 주변 접경지역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둬 항상 일본군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기도 하셨다"고 전했다.
사회주의 운동가였지만 김승빈은 북한에서도 독립운동 성과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조선인민군에 참여해달라는 김일성의 부탁을 거절하고 소련에 남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가 20여 개의 훈장을 소련 정부로부터 받았으며 그 중에는 한반도 해방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은 것도 있지만 정작 조국에서는 남과 북 어디에서도 독립운동을 한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남한 정부는 김승빈이 교육자로서 독립에 기여한 바를 인정해 천안 독립기념관에 그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지만 무장투쟁 부분은 인정하지 않아 독립유공자로 선정하지는 않고 있다. 전기기술자로 일하며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김씨는 "물질적인 지원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은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남한 정부가 과거의 냉전 논리에만 묻혀 경직된 사고를 보일 게 아니라 유연한 시각으로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이 왜 소련군에 참여했겠는가를 돌이켜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