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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 전 벽화에 앗! 고구려인이…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6-07-09 00:00:00조회570회

[고선지 루트 1만 km] 14. 1300년 전 벽화에 앗! 고구려인이…  

우즈베키스탄 국경을 넘어 카자흐스탄 알마티를 향하는 길목.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과 초원의 길을 말을 타고 달렸을 고선지 장군의 길이다. 대상들 또한 낙타에 상품을 싣고 수없이 누볐을 비단길의 황홀한 저녁놀 속으로 낙타들이 걸어가고 있다. 조용철 기자키르기스스탄 국경에서 어린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다.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국계 동포를 고려인이라 부른다. 우리 일정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에는 현재 20만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타슈켄트시 인구의 3%에 이른다. 원래는 구 소련 연방의 연해주 일대에 살았으나 1930년대 스탈린의 민족 분리정책에 의해 강제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당한 고려인의 후예다. 

옛 소련 붕괴 후 다시 러시아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그 전엔 훨씬 더 많은 고려인이 타슈켄트에 살았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과연 고려인들뿐일까. 고선지와 함께 중앙아시아 일대를 평정했던 수많은 고구려의 후예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탈라스 전투 이후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뿌리를 내리고 산 경우도 많지 않았을까. 고선지 루트에 펼쳐진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을 만나는 느낌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7세기 말 고구려가 망한 뒤 많은 고구려인들이 당나라에 끌려왔다. 그 가운데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도 포함돼 있었고, 그는 다른 고구려인 포로와 함께 서북변경으로까지 끌려 왔다. 8세기 초 당나라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고구려인의 후예들과 20세기 초 소련에 의해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 두 고(구)려인의 삶의 시간적 격차는 많이 벌어져 있지만, 강제이주라는 공간적.상황적 유사성은 수백년의 간격을 뛰어 넘는 그 어떤 동병상련의 아픔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역사의 아픔인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아픔을 아픔으로 끝내지 않았다는 데 우리 역사의 묘미가 있다. 강제 이주된 현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며 능력을 인정받았고 세계 문명의 교류에 이바지 했다. 고사계는 포로의 몸이었지만 출중한 무예 실력을 인정받아 안서도호부 8대 장군의 한명으로 발탁 승진됐다. 그의 아들 고선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안서도호부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까지 장악했다. 8세기 중반 고선지는 중앙아시아의 사실상 총독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중국의 종이 만드는 기술이 서방에 전파되었으니 그가 세계 문명교류사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고 할 수 있겠다.

8세기 고선지가 그랬던 것처럼, 20세기 초반 이곳으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과 그 후예들도 한국인 특유의 근면성과 교육열을 바탕으로 현지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고 있다. 어디를 가든지 만날 수 있는 SAMSUNG이나 LG의 홍보 전광판은 모든 고려인들의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우즈벡인들은 DAEWOO를 특별히 기억하고 있었다. 타슈켄트 시내를 돌아다니는 자동차의 절반은 대우 상표를 달고 있다. 대우의 타슈켄트 현지 공장에서 만들어낸 것들이다. 1200여년 전 말을 타고 질주했던 고선지의 활약상과 오버랩되는 장면 아닌가. 유라시아의 한 가운데서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이 대를 이어 펼쳐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의 타슈켄트 지역에 있던 석국(石國)을 고선지가 정벌한 것은 750년의 일이다. 석국은 실크로드의 교차점에 위치해 일찍부터 중개무역이 번성했으며 그만큼 당나라와 아랍 세력 간 전략적 요충지였다. 특히 정교일치(政敎一致)를 표방하는 이슬람 세력이 서아시아에서 동방으로 급속히 세력을 팽창해 나오면서, 석국을 비롯해 이 일대의 나라들이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고 아랍과 연합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석국은 그같은 세력 변화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고선지의 석국 정벌은 이 일대에서 확산되던 이슬람의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꺾는 것이었다. 토번 연운보 정벌(747년)-소발률국 정벌(747년)-석국 2정벌로 이어지는 고선지의 승전보는 당나라가 중앙아시아에서 정치적.군사적 전성기를 누리게 했다. 이 일대의 크고 작은 72개국이 조공을 바치며 당나라의 지배 아래 들어왔다. 중앙아시아 세력 재편의 중심엔 고선지가 있었던 것이다.

타슈켄트의 고려인이 운영하는 텔레비전방송국에서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현지 가이드인 고려인 예니게프 채로부터 우리 일행의 타슈켄트 방문 목적을 전해 들은 방송국측이 인터뷰 요청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 첫 질문이 '고선지를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마치 한국에서는 이제야 고선지를 알게 되었느냐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이 고선지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최근 한국 드라마가 우즈베크텔레비전에 방송되며 한류붐이 불었다고 알려 주었다.

우리는 일정에 따라 발길을 사마르칸트로 돌렸다. 고구려인을 그린 벽화가 발견된 아프라시압 왕궁터로 향했다. 타슈켄트 왕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그려놓은 벽화 속에서 조우관(鳥羽冠.새의 깃털로 장식한 고구려의 모자)을 쓴 두 명의 고구려인이 우리를 반겼다.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는 사마르칸트 바르흐만 왕 재위시(650~670)에 제작됐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바흐르만 왕 이전부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가 만나는 이곳까지 그들의 외교 무대를 펼쳤던 것이다. 동서교섭사의 한 축을 담당하며 국제성을 띤 국가였던 고구려의 위상을 벽화는 조용히 증언하고 있었다.


김주영(소설가).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