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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피 자랑스러워"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6-07-09 00:00:00조회495회

한국정부가 우리의 존재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야 우리 후손들도 고국을 기리며 살지 않겠습니까.”

한때 ‘고국’이라는 단어를 마음 속 응어리로 남긴 채 살았던 사람들이 있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다. 이국 땅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소수민족의 핍박과 설움도 많았지만 조국을 위해 몸바친 선조들의 핏줄이라는 자부심으로 평생을 버텨온 이들이다.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고국 땅을 밟은 이들을 13일 서울에서 만났다.

_독립운동 얘기를 들었을 때의 느낌은.

에피모바 류드밀라(70ㆍ이위종의 손녀)=할아버지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해 전세계를 상대로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강연을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는 얘기를 듣고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할아버지는 매우 열성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말로만 들어도 자랑스럽다.

허프로코피(72ㆍ허 위의 손자)=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잡혀서도 당당하게 저들을 꾸짖었다는 얘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할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셨다. 때문에 우리 부모 세대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내가 같은 상황이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최다닐(69ㆍ최이붕의 아들)=스탈린이 죽은 53년이 돼서야 아버지께 직접 얘기를 들었다. 아마 정부 통제 탓인 것 같다. 만주에서 일본의 군자금을 탈취해 북로군정서를 이끌던 김좌진 장군에게 무기를 전달했다는 얘기는 무협드라마처럼 흥미진진했다.

_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겪은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

김디나 이바노브나(77ㆍ김경천의 딸)=어릴 적 소련 정부가 갑자기 아버지를 강제수용소로 끌고 갔다. 남은 가족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로 이주해야 했다. 생전 처음 간 곳에서 어떻게 살았겠나. (흐느끼면서) 고려인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통에 고생 많이 했다.

기이고르(44ㆍ이상룡의 증손자)=우리 부모는 옛 소련에서 완전히 이방인 취급 받으며 살았다. 아직도 직장에서의 승진 등 여러 차별이 있지만 이제 많은 게 변했다. 연금도 러시아인들과 똑같이 받는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지만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최세르게이(29ㆍ최재형의 증손자)=몸 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피를 언제나 자랑스러워 했다. 하지만 난 러시아인이기도 하다. 증조 할아버지도 어렸을 적에 러시아로 이주했다. 주위 친구들과 내가 다르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_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더 잘 살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없는지.

필란스카야 갈리나(43ㆍ김경천의 손녀)=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러시아나 카자흐는 나라 전체의 생활형편이 좋지 않다 보니 밖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 것 뿐이다.

강허종(70ㆍ강상진의 아들)=한인들이 죽어라 열심히 일한 덕에 그나마 이 만큼이라도 살게 된 것이다. 자신은 밥 한끼 제대로 못 먹어도 자식 공부에는 열과 성을 다하는 게 한인 부모들이다. 나도 자식에게 마찬가지다. 그래서 현재 모습에 후회는 없다. 한국이 발전한 모습은 존경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한다.

김발레리(52ㆍ김경천의 손자)=핏줄이 보고 싶어도 자비로 한국에 왕래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한국에 오고 싶어도 부담이 너무 커 못 오는 게 현실이다.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누가 해결해 주겠는가.

기이고르=조상들이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생각해 봐야 한다. 경제적 어려움은 나중 문제다. 그 분들이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도 그냥 한국인으로 태어났을 것이고 지금보다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자부심이 있다. 다만 한국에서 그저 손님일 뿐이라는 사실이 서글프다. 한국이 우리나라라는 말도 아직 낯설다.

_최근 한국에 특별귀화하는 후손들이 늘고 있는데.

허프로코피=키르기스스탄에서 살던 동생 허 게오르기(62)와 블라디슬라브(55)가 지난 달 귀화했다. 나는 66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 정착했지만 동생들은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다. 난 러시아에서 연금도 받고 있기 때문에 귀화할 생각은 없다. 나이도 너무 많지 않은가. 사실 태어나고 자란 러시아가 더 친숙하다.

기이고르=허프로코피 삼촌과 비슷한 생각이다. (기이고르는 허프로코피의 누나 아들이다) 모든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한국에 와서 살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강허종=부모님이 모두 모스크바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묘소가 그곳에 있다. 한국에서 살 생각은 없다. 묘소를 국립현충원으로 옮기라는 권유가 있지만 가족들도 반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고 있다. 지난 해 한국정부에 연금을 신청했다. 한달에 90만원 정도 나온다고 하더라.

황빅토르(58ㆍ황경섭의 손자)=우리에게 조국은 하나가 아니다. 현재 살고있는 카자흐나 옛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할아버지가 태어난 북한지역이나 지금 내가 서 있는 남한 모두 조국이다. 카자흐에서는 한인들이 공연할 때 북한의 칼춤을 춘다. 이처럼 얽혀 있는 상황에서 귀화는 별 의미가 없다.

_끝으로 바라는 점이 있다면.

황빅토르=할아버지 시신이 묻힌 장소를 아직도 학자들이 찾고 다닌다. 나 뿐만이 아니라 정부도 적극 나서 주었으면 한다. 학자들에게만 맡길 일이 아니지 않은가.

강허종=이국 땅에 살면서 고국이 힘이 없으면 애국심도 소용이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한국이 발전하면서 우리들에 대한 러시아, 카자흐 정부의 인식도 바뀌고 있다. 심지어 한국인들을 존경한다는 말도 나온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필란스카야 갈리나=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낫다. 한국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좀더 자주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도 한국을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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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카자흐스탄에 사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13일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고국 땅을 밟았다. 이들은 6박7일간 국립현충원, 서대문형무소 등 독립운동의 숨결이 살아있는 이 땅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다. 최종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