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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하우스가 있는 집은 고려인들의 집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16-04-19 00:00:00조회1155회

비닐하우스가 있는 집은 영락없이 고려인들의 집이란다.

 

리나의 집에서 우정마을로 가는 길, 아침부터 부슬 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농가와 드넓은 땅들이 고요하게 비를 맞고 있다. 우린 리나가 안내하는 대로 차로 20분쯤 달려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그녀와 친하게 지내는 고려인들의 집을 몇 채 방문했는데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본채 옆으로 다들 비닐하우스 몇 동씩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농가와 비슷하고도 다른 모습.

 

우리 일행을 환한 얼굴로 맞은 푸른 대문 집의 주인아저씨는 비닐하우스를 한 동 한 동 구경시켜 준다. 딸기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겨울인데도 빨갛게 살이 오른 잘 익은 딸기 몇 개를 똑 따서 주신다. 입안에 달콤한 향기가 가득 찬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감탄사를 연발했더니 씩 웃으며 몇 개를 더 따 준다. 땅이 넓은 러시아에서는 비닐하우스 하는 사람이 드물지만 고려인들은 노는 땅을 버려두지 않았다.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는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집은 영락없이 고려인 집이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똑같은 일을 해도 임금을 절반 밖에 받지 못하고 불이익을 당해도 어디 항의할 데도 없었을 고려인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절박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습이 러시아인들 눈에 곱기만 했을까? 집집마다 마당에 작은 정원 꾸미는 것을 자랑스러운 문화로 여겼던 사람들에게, 아랫동네에서 온 황색 인간들, 꽃 대신 먹을 수 있는 작물만을 심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그들의 예쁜 마을을 온통 너저분한 비닐로 덮어버리는 사람들로 여겨지지는 않았을까?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는 시선이 그런 것처럼.

      

비닐하우스 몇 동을 둘러보는 동안, 흙덩이가 신발 크기만큼이나 묵직하게 따라붙었다. 내가 풀숲에 털어내려고 애쓰는 것을 보더니, 아저씨는 보란 듯이 삽을 바닥에 탁 꽂고는 그 위로 신발을 쓱 훑어내면서 시범을 보이신다. 그리고는 삽을 건넸다. 아무리해도 털어지지 않던 흙덩이가 단숨에 쓸려 나갔다. 아저씨에게 엄지를 들어보였더니 멋쩍게 하하, 웃으신다. 우리가 슬슬 갈 채비를 하고 일어서자 독특한 터번을 쓴 옆 집 아주머니는 쏜살같이 집으로 들어가서 큼지막한 상자 하나를 내왔다. 초콜렛과 쿠키들이 가득 들어 있다. 처음 뵌 분인데도 떠나려는 우리 앞에서 눈물을 글썽였다. 나도 뭐라 말할 수 없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차올라서 파란 대문집 아저씨가, 터번을 쓴 쿠키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터번을 쓴 그녀는 어디에서 태어나 살다 왔을까, 터번은 어느 나라 풍습이었을까, 그곳을 떠나와서도 온 몸으로 그 풍습을 기억하지만, 그녀 역시 결국은 이방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늘 이민족 신세였던 분들, 우린 그래도 모국에서 찾아온 귀한 손님인 걸까?

         

마을 공터엔 쥐불놀이 했던 흔적 선명

 

우정마을

 

우수리스크 시에서 빠져나와 드넓은 평원을 1시간쯤 달리다보니 고려인 정착 마을 카레이스카야 제레브냐 드루즈바(고려인 우정마을)’에 다다랐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던 고려인들은 후르시초프 시절 주거이주 자유가 생겼을 때 소련의 각지로 흩어졌다(1953). 그러나 다시 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독립을 한 나라들이 자국민보호정책을 쓰게 되고 추방에 가까운 형태로 방출된다. 재이주 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미하일로프까군 내에 있는 이 마을은 그 이후에 한국 정부와 러시아 정부가 협약하여 무료정착촌으로 조성한 것이었는데, 애초에는 천 동 정도의 대규모 마을을 계획했던 것이 여타의 사정들로 축소되어서 겨우 서른여섯 가구, 백여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로 남게 되었다. 이곳으로 오려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래도 마을의 상징성 때문인지 한국에서 들어온 활동가들도 꽤 되는 모양이다. 마을 중심에 있는 공터에서는 고려식과 러시아식이 혼재되어 있는 놀이 흔적들이 있었다. 쥐불놀이를 했던 흔적, 긴 기둥에 색색의 끈을 매달아 장정들이 하나씩 잡고 춤을 추면서 꼬았다 푸는 러시아식 놀이를 했던 흔적. 아이들은 우리나라의 자치기와 비슷한 고로드키를 하면서 논다고 한다. 마을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다섯 살 가량의 여자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하는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혼혈인 듯 보였는데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 마을에 나타났는지 궁금한 기색이다. 아이 손에 사탕 몇 개를 쥐어 주고는 잠시 서서 통하지 않는 말을 해대다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미소를 나눴다.

 

드넓은 러시아 평원을 달리면서 착잡한 마음이 된다. 두 어 세대를 이곳에서 살다가 중앙아시아 어딘가로 보내지고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살아서 그렇게 한 두 세대를 거치면서 고향이려니 생각할 즈음에 다시 쫓겨났던 사람들. 여기로 돌아왔던 고려인들은 대부분 농민들이었고 차도 없었는데, 농토와 집의 거리가 너무나 멀어서 매일 논밭까지 오가려면 몇 시간씩 걸어야 했다고 한다. 온 종일 농사를 짓고 해질 무렵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낡은 농부의 모습이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것 같았다. 러시아의 하늘에도 붉은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한유진은 공간 디자이너 문화기획자, 칼럼니스트로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마임이 가미된 음악공연을 연주자들과 공동 선보이는 음악에세이라는 독창적 프로그램을 기획 진행 총괄 운영해 광주에 첫선을 보였고 광주의 대표적 민간클래식음악회 상징이 된 광장음악회기획 공연 진행을 10년간 이끌어왔다. 오페라를 가족들이 편하게 만나볼 수 있도록 한 그림자극 라 트라비아타를 대본 공동기획했고 양림동 마을대학 강의와 포럼 진행하는 등 지역의 풀뿌리 문화 저변확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