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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자원봉사자에게서 온 소식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6-07-09 00:00:00조회502회


강제 이주사에 잊을수 없는 땅!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사막 끝쪽인 우수토베, 바람이 많고 겨울이 긴 황무지에 많은 고려인이 분산되어 참으로 어려운 때를 근면과 끈기와 인내로 견디어 온 고려인들이 많이 떠났지만, 아직도 가장 많은 분들이 우수토베 지역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단 3개의 콜호즈에서 자금난에 허덕이며 힘겹게 고개를 넘고 있습니다. 양파 농사를 통해 가장 유명했던 곳이었지만 연이은 농사의 흉작과 병충해로 지금은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어려운 가정들을 보았지만 그 중에 84세 되신 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주위에서는 야마모도라고 부르는데 이 할아버지는 일본말도, 고려말도, 러시아말도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말도 알아듣지를 못하시고 시력도 거의 상실되셔서 아주 돋수 높은 돋보기 안경을 쓰셨는데 그것도 안경테가 떨어져 나간지 아주 오래된 것을 고무줄 끈으로 묶어서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통역을 통해 큰소리를 쳐도 알아듣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할 수 없겠구나 생각 했습니다. 한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반갑다고 계속 말하니까, 생기가 돌면서 러시아말도 아니고 이곳에서 쓰는 고려인 말도 아니고 정확하게 한국말로 당신의 이름과 고향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왜 일본 이름을 가지고 사시냐고 여쭈어 보니니까 그분의 딸이 아버지 대신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가정이 어려워서 1943년도에 일본으로 돈을 벌기위해 갔다가 일본에서 강제로 사할린에 일본 군인으로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나가지 못해서 말도 안통하는 러시아땅의 내륙인 므치크라시노야르스크에서 러시아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1959년도에 카자흐스탄으로 들어와 생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1919년 9월 27일에 태어나고, 고향은 경기도 안성군 공덕면 소사리라고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 이름을 다 말하는데 최진성, 최은순, 당신은 세 번째인 것 같았습니다. 최진경, 최진수 잊을 수 없는 이름을 말하시면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셨습니다.. 초점 잃은 눈망울로 안타까이 우리만 쳐다보시는데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안타까운 만남이었습니다. 그 따님이 말하기를 아버님 살아계실 때 가족들의 생사라도 알고 지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60년 세월을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국적 없는 사람이 되어 그리운 가족의 품을 떠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 많은 일생을 살아온 흔적이 온 몸 속에 가득 배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그렇게 춥지도 않건만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추운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쭈그러진 과일과 채소들을 거둬들이다가 갑자기 나타난 우리를 낯설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많은 식구들이 좁은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고려인 돕기운동회에서 전해 주신 석탄 준비 자금을 드리고 떠나는 저희를 길에 나와서 멀어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전송해 주셨습니다. 이분에게 따뜻한 혈육의 소식을 전해 드렸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습니다.
* 한국에는 각 동사무소나 면에 이산가족 찾기 서비스가 되는줄 알고 있습니다. 그분에 고향에 연락주셔서 한번 알아봐 주시고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작흐스탄에서 소식 드립니다.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소식 2.

이곳에서 고려분들을 만나보면서 오늘날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세계 속의 한국으로 성장하기까지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과 후손들의 복된 삶과 행복을 위해 참으로 많은 분들이 이름도 없이, 댓가도 없이 밑거름이 되어 주셨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일제 치하에서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셨던 이동휘(李東輝)선열의 친 손녀인 리 루두밀라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어렵고 힘든 중에 사범전문학교, 경제전문학교, 공산당 대학을 공부하신 아주 열심이 대단하신 의지의 70세 할머니셨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이동휘) 이야기만 하시면 힘이 나시고 용기가 충만하셨습니다. 지금도 건강하셔서 많은 모임이나 여러곳을 다니시면서 의욕이 충만한 삶을 아주 바쁜 중에 살고 계셨습니다.
1937년 4살 때 우주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해서 할머니(이동휘 부인)의 손에서 11살까지 자랐다고 합니다. 배급 받은 빵은 거의 잡수시지 않고 손녀딸에게 주시면서 길러 주시던 할머니가 1944년 어느 여름날 밤에 굶어서 허기지신 모습으로 돌아가셨다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할머니 묘도 우주베키스탄에 있었는데 새로운 기차길이 생기면서 없어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연금과 자녀의 도움으로 사시는데 생활은 상당히 어려우신 것 같습니다. 고려인돕기운동 자금으로 한달 공과금을 낼 정도의 적은 돈을 드렸는데도 “내가 이것을 어떻게 받느냐고 하시면서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아주 미안해 하시며 억지로 받으시고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만나니 화장실의 관이 낡아서 물이 새는 것을 교체하지 못했었는데, 그 귀한 돈으로 중고시장에 가서 관을 사다 교체했다고 하시며 너무 너무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한많은 소원이 많지만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할아버지 묘에 꼭 한번 가고 싶은 것이 제일 소원인데 생활이 너무 어려워 단지 꿈 뿐이라고 하시면서 한숨을 쉬셨습니다.


소식 3.

91세의 할머니가 홀로 사시면서 직장 생활을 하고 계시는 꿈같은 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이신 최재형(1920년 일본인에 의해 체포되어 순국하심) 선열의 친딸로 남편도 1937년 고려인 탄압때 끌려가 죽임 당하시고, 모든 식구들이다 감옥에서 죽고 하나 있는 딸과 강제이주 당해 살다가 그 하나 있는 딸까지 1949년도에 먼저 죽는 것을 지켜보며 참으로 한많은 일생을 오늘도 살고 계시는 최 엘리자베타 할머니를 뵈었습니다.
"아니 이렇게 연세가 많으신데 어떻게 일을 하시나요?" “내가 받는 연금은 살고 있는 집의 공과금을 내고 나면 남는게 없소. 그러니 어떻게 하겠소?” "그래 얼마나 받으세요?" 여쭈어 보니 말씀은 안하시고 손가락 하나를 쑥 올리신다. 그래서"만덴게요?"라고 하니 고개를 흔드신다. "그럼 얼마지요?" “천덴게!” 고려말보다 러시아말이 더 편하신 것 같이 어렵게 말씀하신다. 천덴게는 한국돈으로 약 8-9천원 정도 됩니다.
가장 어려운 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쓰시고 그 귀한 하나 밖에 없는 그 귀한 생명과 재산과 가정을 통채로 희생해 주신 분들에게 이제는 우리가 보답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려인 돕기 운동회에서 보내 드리는 자금을 전해 드리니 얼마나 감사해 하시는지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모든 것을 해결하시면서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적적한 여생을 보내고 계시는 할머니를 뵈니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요. 오늘도 눈은 많이 내리고 길은 미끄러운데 빵가게에 한 개의 빵을 사러 가시는 작은 아기 걸음같은 할머니에게 따뜻한 봄이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살면 이제 얼마나 더 살겠소? 거 한국에 양로원이 있다는데 거기서 살다가 생을 마치면 안되겠냐?”고 처음 만난 나에게 참으로 안타까운 - 마음 깊이 감춰진 말씀을 토로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생의 황혼기에 마지막 자리를 걱정하시는 할머니를 어떻게 도와 드려야 될까 하는 마음으로 소식을 드립니다. 91세에 직장을 다시시면서 생활하시는 할머니를 위해 따뜻한 자리를 마련해 드릴 수는 없을까요?
* 한번 알아봐 주시고 연락을 주세요.
카자흐스탄에서 소식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