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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번 갈 수 없습니까?”

작성자한겨레신문 9월15일작성일2007-01-29 00:00:00조회667회

“한국 한번 갈 수 없습니까?”
우즈베크서 연금받으며 생활하는 ‘의병대장 허위’ 장손녀 로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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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로자씨를 돌봐온 조카 최나탈리아씨의 가족. 왼쪽부터 조카 최씨의 딸 최알로나, 최나탈리아, 허로자, 최씨의 며느리인 김노나, 최씨의 아들 최이고르씨. 최이고르씨는 의사인데, 허로자씨는 “한국에 가서도 의사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의 말에는 서러움과 분노가 짙게 묻어 있었다.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 2세대 허로자(80)씨. 대표적인 항일 명문가 가운데 하나인 의병대장 왕산 허위(1854∼1908) 가문의 최고령 생존자, 왕산의 장손녀다.

허씨는 지난해 중순 현지 한국대사관에 찾아가 독립유공자에 대한 한국 정부 지원을 요구했지만 “결과를 알려주지도 않는 등 무시당했다”고 했다. 두차례 대사관을 다녀온 뒤 더는 방문하지도 않고, 연락도 안한다고 그의 조카, 최나탈리아(49)씨는 떨며 말했다.

항일영웅 ‘왕산’ 순국 뒤 네 아들 핍박 피해 뿔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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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허학(왼쪽에서 두번째)이 1935년 연해주의 야학에서 고려인들과 함께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모습./허로자씨 제공

수도 타슈켄트에서 기차로 4시간을 달리면 닿는 역사·관광 도시 사마르칸트. 지난 10일 이들을 만난 곳이다. 한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온 건 평생 처음이라며 이내 ‘장군의 손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조국을 한번도 밟아본 적 없는 그의 입에서 한국말이 살아 나왔다. 할아버지 허위 이야기였다. “한두달 만에 한번씩 오면 사람을 여럿을 데리고 와서리, 버선 같은 걸 가마솥 위에 말리고 다 마르면 또 나가지 아니하겠어. 이런 얘기 어머니한테 수도 없이 들었지요.”

대한제국 시절 성균관 박사, 평리원 재판장 등을 지낸 왕산은 1907년 13도 연합 의병부대의 군사장으로서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일본 통감부를 공격하기 위한 ‘서울진공 작전’을 펼친 항일 영웅이다. 왕산은 그러곤 서대문 형무소의 1호 사형수가 되고 네 아들은 일제의 핍박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로 유배가듯 도망간다.

항일의 끝은 풀 수 없는 질곡. “걸리면 몰살당할지 모르니까 우리(허학, 또는 허형이라고도 함), 넷째 작은아버지(허국) 가족은 연해주로, 둘째(허영), 셋째 작은아버지(허준) 가족은 만주로 갔습니다.” 가문은 조각났고, 특히 연해주로 간 이들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며 영원한 부랑자가 된다.

현지 한국대사관 찾아가 지원요청 했지만 거절당해




정부는 지난 7월에야 넷째 허국씨의 아들 게오르기(62)와 블라드슬라브(55)씨를 특별귀화시켰다. 둘째 허영씨의 후손들이 독립유공 보상금을 받는 등 뒤늦게나마 왕산의 후손들이 조명됐지만, 유독 맏아들 허학(1887~1940)과 그 직계만 묻혀 있었다. 허학 자신도 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을 받은 이지만 두 딸(맏딸 허경랑·1924~1997) 가운데 누구도 정부로부터 보상이나 위로도 받지 못한 것이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14일 “허학이 애국지사로 등록된 건 1991년인데 애국지사의 딸로 로자씨가 등록된 건 올 3월”이라며 “지금까지 정부가 허씨에게 지원해준 건 없다”고 말했다. 해외 국적자라도 유일한 직계임이 입증되면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규정을 보훈처가 어겨온 것이다.

“한국서 사람 찾아온 건 처음” ‘장군의 손녀’ 눈에 눈물이…

왕산의 후손을 3년 동안 추적해온 윤덕호(60) 다큐멘터리 감독은 “아들이 없는 집이라 더 소외받지 않았나 싶다”며 “귀화든, 보상이든 허로자씨의 뜻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하는 게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국가의 예우”라고 강조했다.

오른쪽 눈을 잃고 다리도 다쳐 현재까지 미혼으로 살아온 허로자씨는 현재 한달에 4만원에 불과한 우즈베크 정부 연금을 받으며 조카 가족에 얹혀 살고 있다.

그는 기자에게 “한국 한번 아니 갈 수 없습니까?”라고 거푸 물었다.

사마르칸트/글·사진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