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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대장 허위 손녀’ 허로자씨 한국땅 첫발

작성자 한겨레신문 10월4일작성일2007-01-30 00:00:00조회718회

의병대장 허위 손녀’ 허로자씨 한국땅 첫발, “할아버지 산소 가게돼 꿈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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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 의병대장 왕산 허위 선생의 손녀 허로자(오른쪽)씨가 4일 한명숙 총리의 특별초청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해 마중 나온 친척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다. 인천공항/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항일 의병대장 허위의 손녀로 평생을 연해주와 중앙아시아로 떠돌아야 했던 ‘장군의 손녀’ 허로자(80·<한겨레> 9월16일치 9면)씨가 마침내 한국 땅을 밟았다.

팔십 평생에 처음이자, 더없이 성대한 고국 땅의 한가위 명절이 그를 기다리고 있어서일까. 4일 오전 9시 인천공항에 도착한 노인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기차와 비행기로 10시간이 넘는 여행의 뒤끝인데도 피곤한 기색 하나 없었다.

 

“할아버지 산소에 제일 가고 싶습니다. 묘소에 꽃도 바치고 절도 올릴 생각을 하느라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한테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야기를 들었지만 두 분이 돌아가신 날짜도 단단히(정확히) 모르고, 아버지 묘는 지금도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동안 제사도 못 지냈습니다.”

 

말로만 듣던 사촌들 만나 기뻐

태어나서 가장 큰 추석 맞이

여생 한국서 보내는 게 소원

 

그의 할아버지 왕산 허위(1854~1908)는 1907년 13도 연합창의군 1만여명을 이끌고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는 등 의병활동을 하다 일본군에 붙잡혀 1908년 9월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 직후 아버지 허형(일명 허학·1887~1940)은 연해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허씨를 낳았다. 독립운동을 계속한 허형은 1940년 카자흐스탄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옛 소련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겨다닌 허씨는 여든이 돼서야 처음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나라를 찾은 것이다.

 

공항에는 사촌과 조카 등 친척 10여명과 그의 귀국을 도운 고려인돕기운동본부 회원 등이 조촐하게 마중을 나왔다.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허씨는 얼싸안으며 인사를 나눴다. 그는 “처음 만나는 사촌들이지만 어머니한테 얘기를 들어서 조금만 얘기하면 금방 누구인지 알 수 있다”며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한가위 밝은 달은 허씨를 더욱 벅차게 한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추석 때 조카 둘과 함께 집에서 기르던 닭을 잡아 보드카와 함께 고모들의 산소에 올렸는데, 이번 추석에는 여러 친척들과 함께 제대로 된 차례 음식과 청주를 할아버지 산소에 올릴 수 있게 됐다”며 “태어나서 가장 큰 추석”이라고 기뻐했다.

 

허씨는 5일 할아버지가 숨진 서대문형무소를 둘러보고 추석엔 사촌들과 함께 경북 구미시 영암산의 허위 선생 묘소를 참배한다. 10일엔 자신을 초청해준 한명숙 국무총리를 만나는 등 17일까지 한국에 머물 계획이다.

 

 

 

 

허씨는 남은 삶을 한국에서 보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소원이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구경 한 번 오는 것만도 80년이 걸렸는데, 국적을 얻는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허씨는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를 조국의 모습을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 속에 담아두려는 듯 공항에서 서울로 오는 내내 차창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모국에서 추석 쇠기가 그렇게 어려웠던가

한겨레

 

항일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손녀인 허로자씨가 어제 정부 초청으로 모국 땅을 밟았다. 13도 연합 창의군을 이끌고 일제 통감부를 공격하기 위해 ‘서울진공작전’을 펼쳤던 할아버지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생을 마친 지 98년 만이다. 친일 행각을 했던 이들과 그 후손은 이 땅에서 큰소리 치며 살았는데, 애국지사 손녀에게는 조국이 그토록 멀고 야속한 나라였다. 우리가 무심했던 탓이고 미안할 따름이다.

지난달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한명숙 국무총리를 만나 그가 했다는 말이 다시금 가슴을 저민다. “나는 이전 것은 모두 잃어버리고 살았고, 더 어떻게 할 계획도 없던 사람이었다.” 회한이 뚝뚝 떨어진다. 할아버지와 아버지(허형)는 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아픔과 고단한 삶이었다. 조국 정부도 찾지 않았다. 고려인돕기운동본부 등 뜻있는 민간단체가 없었더라면 조국은 끝내 그에게 이국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팔순의 허씨는 남은 삶을 한국에서 보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그럴 권리가 있다. 정부도 그에게 ‘특별귀화’를 허용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라는데 마땅히 그래야 한다. 우리 국민이 그에게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더는 길이다.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발족돼 친일파 재산 환수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광복 후 60여년간 하지 못했던 친일 청산 노력이나,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애국지사와 후손도 진정한 평가를 받을 때 역사 바로 세우기와 국가 정체성도 온전해진다. 그럼에도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조국을 들르지 못하는 애국지사 후손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고 한다. 허씨의 방한이 이들에 대한 관심을 새로이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