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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땅에 뿌리내린 독립의 씨앗

작성자 대구일보 4월 4일자 특집편 작성일2007-04-11 00:00:00조회615회

- 고려인 또 다른 이름의 한민족… 항일무장운동 중심지 연해주 -

 

고려인 동포들의 역사는 부동항으로 유명한 블라디보스토크를 주도로 하는 러시아 연해주로부터 시작된다. 비행기로 2시간 반, 배로는 16시간 정도 걸리지만 실제로는 더욱 가까운 곳, 연해주는 한국의 고토(古土)이며 항일독립운동의 성지였다.

고려인 동포들은 스탈린에 의해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기까지 70여 년간 연해주에서 생활했다. 한국에서 살기 어려워 러시아로 이주한 농민들과 연해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이주한 우국지사들의 이민이었다. 농민을 가장한 독립투사의 이동이었고 항일운동을 하는 의병을 직∙간접으로 도왔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합방 당하자 러시아에 거주하는 많은 고려인 동포들은 귀국을 포기하고 러시아로 귀화하기 시작했다.

순수 농민 성격의 이민자들도 정치적 망명객이 유입되면서 연해주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게 됐다. 의병에 참가한 수는 7만여 명으로 ‘13도의군 성명회’, ‘권업회’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권업회는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했다. 고려인 동포 지도자들은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교육과 언론을 통해 민족혼을 고양하기 위한 사업으로 문화 활동, 학교설립, 신문발행 등을 전개했다.

연해주 고려인 동포학교는 11개가 있었고 사범학교도 설립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만도 고려인 동포학교가 3개나 있었다.

1860년에서 1937년까지 연해주에 생활터전을 잡은 고려인은 20만 명을 헤아렸다. 당시 고려인 동포들의 이주는 합법적인 것이 아니고 한국에서 살 수 없어 이주한 명실상부한 유민이었다. 고려인 동포들은 러시아의 학대를 받으면서도 외국의 유민이었기에 모든 것을 감수해야만 했다. 고려인 동포가 연해주에 정착하면서 크게 공헌한 것은 그 곳에서 벼농사를 시작하고 쌀을 보급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연해주는 독립운동을 공공연히 할 수 있는 곳이고 특히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은 만주의 북간도와 연해주의 의병들이 무기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특히 볼셰비키혁명이 발발하자 고려인 동포 유격대들은 연해주에 주둔한 일본군에 대항해 유격전을 벌였고 일본군을 격퇴한 후 러시아군과 협력해 조국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온 힘을 다해 러시아를 도와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했다.

러시아군으로 종군했던 많은 우국지사들의 생명은 낙엽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일본군이 연해주에서 물러가자 러시아는 고려인 동포 의병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말았다. 항일 투쟁한 고려인 동포들은 러시아에 배신을 당한 것이다. 힘든 토착화 과정과 무서운 항일투쟁에서 고려인 동포들은 주어진 삶에 다시 정치적, 역사적으로 순응해야 했다.

하지만 유랑과 질곡의 역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연해주에서 어렵게 정착 생활을 시작하고 고려인 동포들 중심의 농장에서 생활의 터전을 잡아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즈음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강제이주를 당하게 된 것이다.

홍범도 장군은 연해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항일 독립 운동가이다. 한반도에서 맹활약을 한 후 연해주를 주 활동무대로 옮겼던 홍범도 장군은 항일 의병군의 총대장으로 이곳에서도 신출귀몰한 활동을 펼쳤다. 소련정부에서조차 장군의 활약을 인정, 모스크바에서 레닌에게 권총을 직접 선물받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도 스탈린의 사회주의 바람에 휘둘리며 1937년 강제이주 열차에 실려졌고 그로부터 6년 후, 1943년 10월25일 카자흐스탄의 시골 크질오르다 조선 극장 경비로 지내다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75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세상을 떠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 속에 감추어졌던 장군의 공로와 행적이 밝혀지면서 항일독립투쟁사에서 최고의 민족 영웅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연해주 크라스키노(안치하리)에서 단지회를 조직하고 거사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총을 준비해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계봉우, 장도빈, 강상진, 김규면, 김경천, 이범진, 이동녕, 이동휘, 이상설, 신채호, 이위종, 최봉설, 최재형 선생 등도 연해주에서 활동했던 항일 독립 운동가들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 조명이나 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여전히 많은 독립운동 유적이나 역사자료들이 방치되어 있거나 이곳저곳에 묻혀 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또 허다한 무명 항일독립투사들의 후손들이 타국 타향을 떠돌며 대부분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윤석원기자 ysw@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