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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저력 카레이스키 .1] 영농신화의...

작성자영남일보작성일2006-07-07 00:00:00조회574회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하늘아래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러시아에서는 '카레이스키'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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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한반도에 흉년과 기근이 들면서 당시 황무지였던 연해주에 두만
강을 건너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수확하여 다시 돌아오는 계절농사(
季節農事)를 짓다가 나중에는 아예 국경을 넘어 이주하여 연해주에 정착한
한인들의 수가 약 20만명에 달했다.

초기에는 주로 농업이민(農業移民)이었고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부
터는 항일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우국지사들의 망명이민(亡命移民)이 그
뒤를 따랐다. 연해주를 중심으로 크게 활약했던 항일독립운동은 이미 정착
한 대다수의 농민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제공하였고 식량과 군자금을 대주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업을 실시하였고 무엇보
다 벼농사를 북방 러시아에 전한 공헌을 한 사람들이 바로 카레이스키들이
었다. 당시 한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을 폈던 이유는 한인들이 타고난
근면성, 성실성, 강한 의지력으로 농업과 기타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
휘했기 때문이었다. 극동러시아 전 지역에 한인들이 정착한 곳에서는 틀림
없이 야채와 벼가 공급되어졌다.

한인들에게 가장 비참한 경험인 강제이주는 1937년에 일어난다. 한인의
강제이주에 앞서 한인들의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을 제거했는데 당시 희생
된 한인들이 2천500여명에 달했다. 한인을 실은 열차는 가축 우난차를 개
조, 벽의 널빤지 사이에 틈이 넓으며 화차 중간에 선반을 매어 한 차에 여
러 가구가 탈 수 있게 한 것으로, 사람들을 눕게 하기 위해 짚을 깐 것이
고작이었다. 한 차에 30여명이 탔기에 사람과 사람이 포개서 잠을 자야했
는데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그곳에서 용변을 보아야 하기에 악취가 차안을
진동했으며 극심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야했다. 특히 노약자와 어린이
가 많이 사망하였는데 5명중 1명 꼴이었다 하니 가히 '죽음과의 싸움'이라
고 표현할만 하였다.

중앙아시아에 도착한 한인들은 거처할 집이나 움막도 없는 들판이나 갈
대밭에 내동댕이쳐졌다. 땅을 파고 갈대를 덮은 움막에서 그들은 죽음보다
참혹한 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무엇보다 기후가 다르고 물이 바뀌어 적응
하지 못하고 또 추위와 굶주림으로 견디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강
제이주 다음해엔 7천여명이 사망하였고 그 다음해엔 4천800여명이 사망하
였다 하니 당시의 처참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강제이주 다음해 봄을 맞아 한인들은 결코 굴하지 않고 또 다시
생존을 위하여 몸부림을 쳤는데 특별한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갈대를 꺾고
강에서 운하를 파고 논을 만들어 연해주에서 가져온 벼를 심었다. 이곳 중
앙아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복판에 해당하는 곳이라 햇볕은 좋으나 강우
량이 적어 물이 없어 사막과 같은 곳이다. 강한 햇볕에 물만 충분하면 벼
농사에 둘도 없는 호조건이 된다.

한인들은 그들만의 강한 의지력과 근면성을 발휘하여 논에서 염분을 빼
고 열심히 가꾸어 풍년을 이루고 이듬해에도 계속적으로 벼농사에 성공하
여 벼를 멀리 유럽에까지 보급하였으며 '고려인하면 쌀, 쌀하면 고려인'을
연상하게 하였다. 중앙아시아에 대책도 없이 무조건 버려진 고려인은 벼농
사에 성공하여 재생할 수 있었고 중앙아시아에서 모범적인 소수민족이 된
것이다.

한국학 전문가인 소련 과학 아카데미 산하 경제연구소 부소장인 밀레르
박사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근면함과 그들의 경제적 애국
주의는 가히 놀라운 그들만의 특성이라 볼 수 있다."

벼농사는 연해주에서 경험이 있다지만 처음 보는 목화 재배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 기록적인 수확을 올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인 '허세르게이
' '허동윤' '이봉준' 등 10여명이 목화재배에서 성과를 이루어 근로영웅이
되었다. 고려인들은 어떤 식물을 재배하든 높은 수확을 올렸다.

60년대초 고려인 콜호스(집단농장)에서 전 카자흐스탄의 70%에 해당하는
양파를 생산하였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콜호스가 김병화 콜호스다. 타슈
켄트에서 가장 크게 그리고 훌륭하게 땅을 다스려 옥토를 일궈놓은 분이
김병화 선생이다. 사막지대나 억새가 수북했던 땅을 목화밭으로 만들어 세
계 목화 생산의 20%를 차지할 정도의 주생산지로 만들어 놓았다. 그분은
이주 직후 300만평의 황무지에서 사방으로 물길을 놓아 밀, 목화, 옥수수
를 가꾸고 끝내는 벼농사까지 성공시켜 황금 들녘을 일궈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후방에서 대대적인 식량지원을 한 공로로 증산과 함께 '이중 노력
영웅'의 칭호까지 받았다.

고려인들은 1940-45년 사이 목화와 벼농사를 위한 파종 면적을 10배로
증가시킬 정도로 농업에 있어 탁월함을 나타냈고 40년대 말부터 60년대까
지 210명의 고려인들이 사회주의 근로영웅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인구비로
볼 때 고려인들이 가장 많은 상을 받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고려인들은 농업 외에도 공업, 과학, 문화와 체육 등에서도 탁월한 재능
을 보이며 그들 스스로 삶과 터전을 타향 객지에서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 고려인들은 그야말로 불모지 사막을 옥토로 바꾼 신화를 창조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