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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저력 카레이스키 .2] 60년만에

작성자영남일보작성일2006-07-07 00:00:00조회53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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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저력 카레이스키 .2] 60년만에 돌아온 고려인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중앙아시아 50만명 고려인은 서서히 절망적
인 상황이 되었다. 소련으로부터 독립된 국가들이 자국민 보호정책, 자국
언어 사용, 회교 민족주의에 의한 민족차별주의 정책과 정서속에서 더 이
상 버틸 수 있는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 고려인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돌
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인은 조상이 살았던 마음
의 고향, 연해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현재 민간단체가 조사한 2000년 자
료를 보면 연해주에 재이주한 고려인의 수는 5만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
다.

다행히 98년 연방정부로부터 재이주한 연해주 고려인을 위한 보상 조치
로 군부대가 철수하면서 비어 있는 군(軍) 막사를 영구 임대 형태로 사용
하도록 허락되었으나 러시아 물자 부족으로 유리창, 마룻바닥, 천장, 창틀
등 뼈대만 남은 폐허 같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시간 40분 거리에 있는 임시 정착촌 노보네지노 지
역은 농사를 짓고 싶어도 트랙터도 없으며 물을 퍼 올릴 수 있는 모터 하
나 없이 맨손으로 농사를 짓고, 모종을 위한 포트는 신문 종이를 말아서
사용하고 있고, 하우스 대는 산에서 휘어지는 나무 줄기를 이용하여 농사
를 짓고 있다. 라즈돌노예 임시 정착촌은 난방은 해결되었으나 전기세를
못 내어 언제라도 끊길 위기에 놓여 있고 물은 멀리서 양동이로 길러 먹고
있다. 박 발렌찐은 15km 떨어진 밭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농사를 짓고
있다.

크레모보와 임시 정착촌 군 막사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은 약 40가구 10
0여명으로 가장 많다. 러시아인은 난방 시설이 된 아파트에서 사는데 고려
인은 3년째 난방이 안 되는 낡은 3동의 아파트에서 벽돌에 코일을 감아 난
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어느 집은 하루 종일 물을 데워 수증기로 영하
30도의 추위를 이기고 있다. 또한 그들은 가까운 데 토지를 얻지 못하여
13km 떨어진 곳에 움막을 치고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간 농막에서 살면서
하루 14시간씩 일을 한다. 작물을 팔 때까지 국내 민간 단체에서 지원하는
월 500루블(2만4천원)로 살아가는데, 군 막사를 순회할 때마다 "우리, 그
돈 가지고 살았소!"라며 진정한 감사 인사를 하는 고려인을 만나게 된다.

99년도는 가뭄으로 농사를 망치고, 2000년은 두 번의 장마 비로, 2001년
에는 가뭄과 장마로 농사를 다 망치게 되자 "하늘은 왜 우리를 이렇게 바
쁘게(어렵게) 살게 하나요?"하는 가난과 핍박, 추위, 그리고 강제이주와
인간의 기본 생존권마저 누리지 못하는 악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고려인들
의 절규를 종종 듣는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다
시 올해 농사를 준비하고 있다.

고려인 군막사 중 가장 성실하고, 자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포포프카
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시간 거리에 있다. 이곳 고려인은 2년째 실패한
농사지만 "우리 고려인이 농사 아니면 무엇을 하겠소?"라면서 폐허 건물
마루를 뜯어 하우스를 만들고 종이로 포트를 만들어 모종할 준비를 하고
있다. 물은 5km나 되는 곳에서 물탱크 달린 트랙터를 끌어다 사용한다. 겨
울에는 탱크가 얼어서 겨우 밑바닥의 물을 이용하고 있다. 한 양동이의 물
로 음식 만드는 일과 양치질, 세수를 하고 양말과 걸레를 빤 후 음식 구정
물과 함께 밖에 버린다. 하우스 시설도 없지만 6개월의 겨울 내내 땅이 얼
어서 배수가 안된다.

하지만 고려인은 건물이 붕괴되면 움막을 쳐서라도 고려인들끼리 살고싶
어 한다.

"우리가 흩어지면 우리 자손이 러시아인과 결혼하게 될텐데, 그럼 우리
조선 사람은 영원히 사라집니다. 우리는 같이 살면서 농사일도 하고 결혼
도 시키고..., 고려 사람은 고려 사람과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근처이며 연해주의 거대한 항카 호수 근처인 플라
토노브카의 고려인은 폐허된 군부대 아파트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마을
의 개인 주택과 유치원을 빌려 살고 있다. 서 로베르트 가정의 한 어린이
는 러시아 의사에 의해 주사를 잘못 맞아 키가 자라지 않고 기형아처럼 살
고 있지만 러시아 국적이 없어 호소도 할 수 없으며, 두 아이는 영양 실조
로 다리와 팔이 휘어져있고 때로는 전구마저 없어 캄캄한 밤을 보낸다. 몇
차례 방문하였지만 곰팡이, 습기 그리고 오줌 냄새로 오래 앉아있을 수 없
었다.

돈이 없어 러시아인들의 토지와 기계, 그리고 종자를 이용하여 소작농사
를 짓지만 판매권을 가진 러시아인들이 돈을 주지 않고 오히려 빚을 졌다
며 큰소리치면서 온갖 횡포를 부리지만 대책이 없다.

자립의 의지도 있고 농사에 대한 기술가 방법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자립
할 수 있는 경제적 지원이 없어서 악전 고투하고 있다. 국내 기업, 민간단
체, 종교단체에서 산발적인 지원을 하고 있으나 근본적 대책은 없다. 국적
은 러시아인이지만 재이주 고려인 문제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러시아 정부
에서도 지원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민족이다. 또한 일제때 강제 징용과 조국 독립운동
을 위하여 연해주에서 살았던 독립운동가의 후예이다. 오늘날 풍요로운 삶
을 누리고 있는 우리들은 추위와 가난 속에 살고 있는 고려인에게 빚을 지
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진 빚을 갚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지난
2년 동안(2000-2001년) 고려인돕기 운동회는 고려인 재생기금회를 중심으
로 고려인의 안정적 농업 정착을 위하여 11만달러를 지원하였다. 여러 단
체와 공동사업으로 러시아 속의 고려인의 지위 향상과 고려인의 위상을 위
하여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하였으나 역부족이다. 고려인들과 함께 한 자원
봉사자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크게 도와주지는 못했어도 그들에게 큰 위로
와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다. 그들에게도 조국이 있고, 조국의 동포가 곁
에 있다는 사실이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도정호<영남일보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