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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이야기(1) - 우리가 기억해야 할 ...

작성자구구닷컴작성일2006-08-11 00:00:00조회58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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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당신의 이름은 우리입니다’
고려인 이야기(1) -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민족사
▲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그리고 다시 연해주로 그 오랜 세월을 유랑하면서도, 리 올랴 할머니는 여전히 ‘내 조국은 한반도’라고 말한다.©'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

팔순을 넘긴 리 올랴 할머니의 얼굴은 고려인 노인들이 다 그렇듯 살아온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깊은 주름을 새기고 있다. 강제이주 당시 이곳 연해주에서 살았다는 할머니는 다시금 찾아온 이 땅이 그나마 반갑단다.

그러다 할머니는 문득 “참 내 고향은 아니지 … 그래도 내 고향은 다른데 있지. 여기가 어떻게 내 고향이우”라며 말끝을 흐린다. 할머니의 눈빛은 아버지의 고향, 야트막한 산과 강이 흐르던 그 땅을 그리는 듯 아득하다.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그리고 다시 연해주로 그 오랜 세월을 유랑하면서도, 리 올랴 할머니는 여전히 ‘내 조국은 한반도’라고 말한다.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 중에서)

연해주를 포함한 구소련에는 이렇게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내쫓기고 내쫓기는 55만여명의 한인들이 있다. 무엇이 이들을 조국을 떠나 이 머나먼 땅까지 내몰았을까. 그 시점은 15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반도에서 연해주로

구한말 봉건 지주들의 가혹한 수탈과 기아, 계속되는 민란과 병란으로 한인들이 국경을 넘어 북만주와 연해주로 들어가 정착하기 시작했다. 1863년 연해주 포세트 지역에 13가구의 한인들이 정착했다는 첫 기록이 있다.

그 후 해마다 이주민의 수가 증가했다. 1869년 한반도 북녘의 대기근은 대량 이민자를 낳았고,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망명이나 독립운동을 위해 두만강을 넘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다.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 중 많은 사람들은 각지에서 국권회복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독립운동의 바람이 거세질수록 죽임을 당하는 한인들의 수도 늘어갔다. 이상설, 안중근, 이동녕, 이준, 이용 … 그리고 수 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

살아남은 한인들은 강한 개척정신과 특유의 성실함으로 사회적 차별 등의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러시아 사회에 정착해갔다. 황무지를 개간해 1905년 벼농사를 시작한 한인들은 이후 연해주 벼 재배의 90%를 차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연방은 이미 이러한 부의 축적을 허용하는 체제가 아니었다. 1929년 스탈린이 모든 사유재산을 몰수하고 집단농업을 도입함으로써 한인들의 생활 기반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 1863년 연해주 포세트 지역에 13가구의 한인들이 정착했다는 첫 기록이 있다.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연방은 민족주의적 경향의 한인들이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리하여 러시아 인민위원회의 결정으로 1928년부터 1930년까지 3천여명의 한인이 하바로프스크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중앙아시아 하바로프스크 구역의 쿠르다르기아와 신디아에 이주한 한인에 대한, 러시아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강제이주 당한 한인 60가구 중 11가구가 도망쳤다고 한다. 남은 사람들은 우물이 하나도 없어 늪지의 물을 이용해야 했으며 의료지원을 받지 못해 3월부터 6월까지 16명의 어린아이가 숨졌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혹독한 강제이주는 1937년 실행됐다. 당시 한인의 이주 규모는 36,442가구 17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강제이주 전 반발을 막기 위해 러시아공산당은 한인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2천5백여명의 인사들은 체포해 하바로프스크 등에서 즉결 처형했다. 당시 남편의 생사를 몰랐던 한 부인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후 30년이 지나서야 남편의 사망통지서를 받고는 오열을 터뜨렸다고 한다.

대다수 한인들은 막연히 소문으로만 이주에 대해 알다가 강제이주 며칠 전에 통보를 받았다. 그들은 구겨지듯 화물칸에 태워졌다. 이주 중에 먹을 것은 전혀 공급받지 못했고, 간이역에서 구한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물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역이 돌아 10명 중 6명꼴로 아이들이 죽어 나갔다. 만주와 연해주를 누비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운동가와 항일의병들의 후손들이 이와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한인들은 40여 일간 1만여km를 달려 중앙아시아 지역(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에 도착 했다. 이 지역은 반사막지대로 여름에는 40도가 넘고 겨울에는 몹시 추웠다. 아무런 준비없이 맨몸으로 이곳에 던져진 한인들은 학질과 풍토병으로 수도 없이 죽어갔다.

이들은 새로운 주거지에서 거주지역이 제한된 신분증을 소지해야 했다. 한국어가 소련 내 소수민족 언어에서 제외됨으로써 한인에 대한 민족교육은 금지했고, 적성민족으로 구분돼 군복무와 국가기관 취업이 극도로 제한됐다.

그럼에도 한인들은 개미처럼 일해 황무지를 개간해 옥토로 바꾸고, 그곳에 쌀, 야채, 목화 등을 재배해 성공함으로써 소련 중앙아시아에 정착해갔다.

▲ 강제이주 전에 연해주의 고려인 학생들. 이 아이들의 절반은 중앙아시아로 가는 도중에 기차에서 굶어 죽고, 앓아 죽고, 얼어 죽었다고 한다.©'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

그리고 다시 연해주로

1991년의 소연방의 해체와 새로운 신생독립국들의 독립은 50여년간 중앙아시아에서 삶의 터전을 닦아왔던 한인들에게 새로운 시련의 계기가 되었다.

중앙아시아 우즈벡공화국과 카자흐공화국은 연방에서 분리 독립하면서 반소련정서와 민족주의가 맞물려 토착어 사용을 의무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수민족인 한인들은 많은 역차별적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교육열이 높아 화이트칼라 직종을 차지했던 한인들은 현지인들의 눈에 불쾌하게 비춰졌다.토착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현지 한인들은 관공서, 병원, 연구원 등에서 해직당하거나 좌천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2005년 6월 7일자 주간조선에 의하면, 한국에 난민 신청을 한 고려인 2세 스베틀나라씨는 “우즈벡공화국에서는 지난 7년간 그리스ㆍ유대계 10만명이 탈출했고, 30만에 이르렀던 고려인도 10만명으로 줄었다”고 전했다.

대부분의 한인들은 아직까지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지만, 많은 수의 한인이 다시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 극동(연해주)으로 이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연해주로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으로 연해주정부로부터 소련군이 철수한 과거 군대막사를 제공받아 임시 거처로 사용하고 대여 받은 토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하루하루 힘겨운 생존투쟁을 하고 있다.

 

 

이영주 기자 joseph@googood.com  2006년 7월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