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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또 다른 이름의 한민족

작성자 대구일보 4월 10일자 특집편 (3작성일2007-04-11 00:00:00조회512회

(3)강제이주와 중앙아시아 정착 그리고…

 

1937년 9월21일~11월15일,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고려인 동포들은 6천㎞나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당시 고려인은 우즈베키스탄 1만6천272가구 7만6천525명, 카자흐스탄 2만170가구 9만5천256명 등 모두 3만6천442가구 17만1천781명에 달했다.

강제이주는 지식인의 사전 처형으로부터 시작됐다.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간 수천 명에 달하는 고려인 동포 지도자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희생된 고려인 동포 지식인은 2천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곧이어 진행된 강제이주에 대한 통보 역시 출발 며칠 전에야 이뤄졌다. 이주통보 이후 여행이 중지된 상황에서 거의 빈 몸으로 이들은 정든 땅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곡식의 씨앗은 잊지 않았다고 하니 고려인 동포들의 농사에 대한 집념을 짐작케 한다.

고려인 동포들은 억울하고 비참한 강제 이주를 당하면서 한마디의 저항도 심지어 불평도 할 수 없었다. 고려인 모두는 화물과 가축을 싣는 열차에 짐짝처럼 실렸다. 가족이 서로 다른 기차에 실리기도 하고 친지간 동석은 고려조차 되지 않았다. 고려인 동포들을 실은 거대한 비극의 수송열차 행렬은 아시아 대륙 한 쪽 끝에서 시베리아 벌판을 지나 다른 끝으로 이어졌다. 행선지도 알 수 없었다. 매서운 시베리아의 삭풍 속을 한 달 여간 달려 중앙아시아에 도착했다. 열차에서는 먹을 것을 전혀 공급받지 못했다. 기차가 석탄이나 물을 보충하기 위해 간간히 역에 정차하는 게 전부였다. 기차 안에는 화장실이 없어 역구내에 열차를 세우면 모두가 내려 대소변을 본다는 이유로 역도 아닌 허허벌판에 기차가 세워졌다. 40여 일간의 오랜 여행 도중 어린이 60%가 사망했다. 여행 중에 가족이 여러 열차로 흩어져 이산가족도 다수 발생했고 사고도 잇따랐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카자흐스탄 사막지대 우슈토베였다. 우슈토베에 도착해서는 이질, 장티푸스, 말라리아 같은 무서운 전염병으로 또다시 1만 여명이 사망했다. 그곳은 사막지역으로 겨울에 도착한 그들은 맨손으로 땅을 파 토굴을 만들어 그 속에서 혹독한 겨울을 나야 했다. 현재 그 곳 움막토굴 옆에는 고려인 공동묘지가 있다.

고려인 동포들은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한 후 수용시설이라곤 전혀 없는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졌다. 무서운 추위와 배고픔으로 겨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1938년 인구표본조사를 보면 1천 명당 42명이 사망했으며 유아사망률이 20%나 됐다. 특히 고통스러웠던 기간은 이주 첫해 겨울부터 이듬해 농사를 짓기까지의 기간이었는데 토굴이나 창고, 마구간 등을 개조하여 겨울을 났으며 방바닥은 맨 땅이었다고 한다.

강제이주 이후 고려인 동포의 거주이전은 제한됐다. 고려인 동포들은 일정한 거주구역이 명시된 신분증을 소지하게 됐으며 그 결과로 적어도 1953년까지 약 16년간 집단적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교육이 금지되었음은 물론 국가기관 취업과 취학에도 제한이 있었다. 사회∙정치적 진출도 사실상 봉쇄되어 있었다. 이 모든 제한은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비로소 완화되기 시작했다.

고려인 동포들은 불굴의 정신으로 주어진 시련을 이겨내고 새로운 땅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벼농사를 시작, 우즈베키스탄을 주요 쌀농사 지역으로 변화시켰다. 고려인 동포들은 목화 등 다른 작물에서도 뛰어난 실적을 올리면서 빠르게 정착해 갔다.

고려인 동포는 중앙아시아 개발에 앞장서 특유의 개척정신과 영농법으로 수많은 모범 콜호즈를 탄생시켰다. 소연방이 자랑하던 콜호즈는 대부분 고려인 동포 콜호즈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력영웅을 낳았음은 물론이다. 인구대비 노력영웅 비율은 모든 민족 가운데 최고를 자랑했다. “소련 전역에 서 노력영웅은 모두 1천200명가량인데 그 가운데서 고려 사람으로서 노력영웅이 된 사람만 약 750명가량 된다. 그 중에서 우리 ‘스베르드보프 콜호즈’에서만 21명의 영웅이 나왔다. 단연 최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련했다 싶기도 하다.”(한운석 동포의 증언 중에서)

맨손으로 갈대숲을 베고, 수로를 팠고, 늪을 말렸고, 땅을 갈아엎어 씨를 뿌렸다. 그리고 지푸라기와 갈대를 섞어 벽돌을 만들고 집을 지었다. 강제이주의 악몽을 잊으려는 듯 고려인들은 죽음 같은 노동에 그들의 온몸을 던졌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1970~1980년대에 이르러 드디어 일반 노동자들의 10배에 달하는 높은 소득을 올렸고, 소련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전문인으로 활동하는 고려인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작가 아나톨리 김, 가수 율리 김과 빅토르 최, 성악가 넬리 리, 체조 선수 넬리 김 등은 세계가 인정하는 고려인들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이제 다리를 뻗으려나 했다. 이제 손자 손녀 웃음보며 지나온 악몽을 먼 옛날 얘기로 묻으려나 했다.

그러나 역사는 이들을 다시 한 번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다. 60여 년의 세월, 뼈가 부서져라 일하고 등이 굽어라 일한 그들에게 역사는 죽음 같은 고난의 길을 예비해놓은 것이었다. 생활의 안정과 기반을 잡은 후세대들이 중앙아시아를 제2의 고향, 제2의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던 시절, 1991년 민족 간의 갈등이 터져 나오며 소련이 붕괴된 것이다. 이제 러시아어를 사용해서도 안 되며 소련 시절의 어떤 훈장도 소용이 없게 됐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심지어 타지키스탄 지역과 아랄해 인근의 고려인들은 내전과 사막화로 인해 ‘난민’ 신세가 되기까지 했다.

독립 국가들은 자국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민족 차별정책을 가속화해 고려인들의 숨통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결국 고려인들이 생산하는 농산물과 가축은 어디에서도 판매할 수 없게 됐고, 오로지 러시아어만을 사용했던 고려인들은 그 나라의 말을 모른다는 이유로 취업의 길마저 가로막혔다.

더구나 고려인 대부분이 공무원, 교사, 의사, 연구종사자, 집단 농장장 등 전문 분야에 종사하던 터라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단기간에 독립국가들의 언어를 습득하여 재취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집과 재산을 버리고 떠나라는 협박편지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대부분의 전문직 종사자들은 단순 노동자,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60년 그 피 같은 청춘을 쏟아냈던 고려인들에게 돌아온 현실은 남의 집 처마 셋방살이의 현실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자료제공 고려인돕기운동본부>

 

정리 윤석원기자 ysw@idaegu.com

 

◆‘고려인돕기운동본부’(www.koreis.com)의

‘10만 고려인가정 돕기 자매결연 사업’ 참여 문의 02-430-3278,

전용계좌 농협 100026-51-082283 (예금주 (사)고려인돕기운동본부).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고려인 동포들은 카자흐스탄 사막지대 우슈토베에 내팽개쳐졌다. 우슈토베에 세워진 비에는 ‘이곳은 원동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1037년 10월9일부터 1938년 4월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이다’고 적혀 있다.

고려인 동포들은 강제 이주를 당했지만 특유의 개척정신과 영농법으로 중앙아시아 개발에 앞장서 수많은 모범 콜호즈를 탄생시켰다.